'나무파파'라는 나의 필명에서 유추할 수 있듯 나는 육아 중인 아빠이다. 내 아이의 태명은 '나무'였다. 보통의 귀염뽀짝한 태명과 거리가 있었기에 당시 '나무'라는 태명을 듣고 많은 분들이 어리둥절해하였다. '나무'라는 태명을 지은 이유는 이러하다. 임신 전 아내와 나는 등산을 취미로 하였다. 건강증진이라는 통상적 목표와 더불어 산행 중 끓여 먹는 라면이 꿀맛이었기에 라면 맛집이라는 우스갯소리와 함께 한동안 산행을 즐겼다.
산이 화사함을 한껏 입은 6월 어느 날 우리는 지리산으로 산행을 떠났다. 산의 정취를 오롯이 즐기겠다는 등로주의를 택한 우리는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살랑이는 바람과 이에 맞춰 춤추는 나무의 푸르름을 감상하였다. 대자연에 안긴듯한 포근했던 산행으로부터 며칠 뒤 아내는 감격에 찬 얼굴로 임테기를 보여주었다. 두줄이 표시되어 있었다. 내 인생에 감격스러운 순간을 손가락으로 꼽으라면 반드시 포함될 순간이다.
지리산에서 마주한 수많은 나무들이 우리 아이를 축복해 주는 것만 같아 '나무'로 태명을 정했다. 이후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고 부모가 된 감격의 순간도 잠시, 육아 전쟁에 돌입하였다. 그렇게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낸 지도 벌써 2년이 되어간다.
전쟁 같다는 비유가 육아의 고난과 역경만 대변하는 것 같아 조심스럽지만, 정말이지 워킹맘, 워킹대디에게 정말 하루는 너무 짧고 고되다. 아이의 어린이집 등원과 함께 회사로 출근하고, 회사의 퇴근과 함께 육아의 세계로 출근한다. 아이가 잠들고 집안일을 마친 후 약간의 쉬는 시간이 주어진다. 이 시간이 무척 소중하다. 그때 독서를 하거나 못 본 예능을 보며 짧은 자유를 만끽한다.
이렇게 매일매일이 타이트하다 보니 예전에는 도대체 그 많은 하루를 어디에 썼나 싶을 정도로 시간의 소중함을 여실히 느낀다. 돌이켜보면 이렇게 쫓기는 듯한 삶에 나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취약해지고 있었다.
인기리에 방영된 아빠의 육아 프로그램처럼 나도 슈퍼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디어가 그려낸 표상에 맞춰 완벽한 가장이 되고자 결심하고 노력했다. 결혼 후 살림의 대부분은 손이 야무진 내 역할이 주요했기에, 육아에 있어서 내 역할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집안일을 얼른 끝내고 아이와도 즐겁게 놀아주겠다는 야심 찬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현실 달랐다. 시간은 늘 부족했고, 과도한 목표는 불가능한 이상이 되었다. 나는 점점 지쳐갔다. 완벽한 아빠가 되겠다는 목표와는 반대로 아이와 아내에게 짜증만 내는 빵점 아빠가 되어갔다.
짜증과 다툼, 화해와 웃음이 불규칙 파동처럼 반복되던 어느 날, 공감을 위해 읽은 <85년 생 육아아빠>에서 뒤통수의 얼얼함을 경험했다.
'제가 찾은 진짜 해결책은 아빠가 슈퍼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빠는 슈퍼맨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다 짊어지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큰 오만이었는지, 이런 과정 중에 발산한 화와 짜증이 얼마나 아내와 아이에게 상처였을지 뼈아프게 느낀 순간이다.
육아란 혼자만의 과정이 아닌 부부 공동의 여정이다. 한쪽의 부족함은 흠결이 아니다. 오히려 상호 보완의 여지이다. 완벽이라는 강박에 가려 나의 부족을 자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음의 족쇄를 풀어내자 내 결점과 아내의 강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손이 야무지고 빠르다. 반면 아내는 그렇지 못하다. 나는 감정 기복이 심하고 짜증이 많다. 반면 아내는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나의 강점이 집안 살림을 책임진다면, 아내의 강점은 집안의 화목을 책임졌다. 아내와 아이에게 짜증이 많던 나는, 아내의 조곤조곤한 조언과 감정적 돌봄으로 이를 줄여나가고 있다.
그리고 나는 사소한 것에 꼼꼼하지만 큰일에 있어 성급한 결정으로 일을 그르칠 때가 많다. 하지만 아내는 작은 일에는 덜렁대지만, 진중한 성격에 큰일에는 현명한 결정을 한다. 외출할 때 아이의 용품 같은 사소한 것들은 내가 꼼꼼히 챙기고, 큰일을 결정할 때는 아내의 슬기로움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나의 결점이 미안하기도 했지만, 나의 부족분을 그녀가 보완해 주듯 나도 그녀의 부족한 곳을 채워주면 되기에 미안이라는 감정보다 고마움을 되새기고자 한다. 이렇듯 그녀는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향상심의 뮤즈이다.
이렇게 육아를 통해 아내와의 관계가 발전해 나간다. 지금까지의 아내와의 관계가 사랑이 주였다면, 여기에 더해 존중과 신뢰라는 감정이 자라고 있다. 아이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고맙고 감사한데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게 해 준다. 육아를 통해 철없던 나 자신이 조금은 성숙해지고 아내와의 관계도 단단해져 감을 느낀다.
이제 두 돌이 다가온 우리 아이는 요즘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말귀를 곧잘 알아듣고 동물 위주의 단어를 말하곤 하는데 그 모습이 무척 사랑스럽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아내와 아이와 함께 할 앞으로의 새로운 경험과 일상이 기대되고 우리 아이에게 행복한 기억과 추억을 많이 많이 선사해주고 싶다. 같이 농구경기도 보러 가고 캠핑도 가고, 해외여행도 가고 싶다. 그렇게 아이와 함께할 미래를 아내와 하나둘씩 그려보곤 한다. 이렇게 다가올 미래의 계획을 세우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인간의 미래지향성은 출산과 육아에서 오는 게 아닐까? 요즘 저출생이 전 세계적으로, 특히 우리나라에서 심각한 문제이다. 내가 관련 전문가가 아니기에 확언할 순 없지만, 욜로(YOLO) 같이 미래보다 현재에 더 큰 가치를 두는 사고들은 지금의 저출생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느낀다. 둘 중 어떤 것이 우선인지 모르지만 서로 영향을 주는 순환적 인과성을 띄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내가 살아보지도 않은 타인의 삶에 이러쿵저러쿵 참견을 하는 것만큼 오만한 것도 없지만, 그래도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에게 한번쯤은 출생과 육아가 주는 기쁨과 환희를 알려 주고 싶다. 아이가 주는 행복의 빛은 너무 강해서 다른 어둠을 모두 몰아낸다. 직장 상사가 주는 스트레스, 승진에 대한 압박 등등 이전에 중요한 가치로 여겼던 것들이 철없던 사춘기 시절의 고민처럼 느껴진다.
며칠 전 가수 션이 나와 인터뷰하는 짤막한 숏폼 콘텐츠를 보았다. 인터뷰어가 이런 질문을 한다.
'아이를 키울 때 언제가 가장 힘듭니까?'
션은 이렇게 대답했다.
'질문의 순서가 잘못되었어요. 아이를 키울 때 어느 순간이 가장 행복합니까?라는 질문을 우선 해야 해요. 먼저의 질문은 아이를 키우는 게 힘들기만 하다는 인식이 숨어져 있어요.'
참 멋진 말이다. 우리는 육아를 힘들고 고된, 부모의 책무를 다해야 하는 무거운 행위로만 인식하고 부담스럽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사실 육아의 전반적인 과정은 행복이다.
무한한 사랑과 행복을 알게 해 준 아들에게 감사하다. 아들이 바르게 자라 세상의 행복을 충만히 느끼게 해주고 싶다. 때로는 즐겁게 웃고 떠드는 친구 같은, 때로는 언제든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기댐목같은, 어느 때는 힘들 때 쉬어갈 수 있는 안식처 같은 부모가 되고 싶다. 언제 어느 때나 그를 응원한다. 우리 아이가 나의 나무였듯 나는 그의 뿌리이고 싶다. 깊은 뿌리가 되어 세상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을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