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 가방"

by 나무파파

가방을 하나 샀다. 기존 가방은 어딘가 아쉬웠다. 수납공간도 부족하고 튼튼하지 않은 느낌이다. 곧 둘째가 태어난다. 두 아이를 데리고 간단한 외출이라도 하려면 챙겨야 할 물건이 한가득이다. 기존 가방으로는 그 물건을 모두 담을 수 없고, 집에 있던 육아 가방은 손에 들어야 하는 디자인이다 보니 활동성이 떨어졌다. 아들 둘을 데리고 한 손에 짐가방을 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우려하던 불편함을 해소할 수 있는 가방을 하나 샀다.

러기드한 디자인에 용량은 48L에 달하고, 다량의 수납공간이 있다. 각 공간에 물건을 잘 구분해서 넣으면 바쁜 순간에도 필요한 물건을 손쉽게 꺼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에는 다소 과한 듯 하지만 곧 태어날 둘째를 데리고 외출해야 하는 순간 이 가방은 분명 엄청난 유용성을 발휘할 것이라 기대한다.

가격도 만족스러웠다. 정가는 30만 원에 육박했지만, 때마침 할인 쿠폰이 도착해 훨씬 낮은 가격에 구입했다. 필요성과 실용성, 디자인과 가격까지. 재화의 구입을 위해 고려해야 할 모든 요소를 충족하는 완벽한 쇼핑이었다고 자평했다.

이 가방을 구입하게 된 건 사실 우연이었다. 잠시 머리를 식히려 들어간 유튜브에서 이 가방을 소개하는 영상이 알고리즘에 떴다. 마침 나에게 필요한 제품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리저리 검색해 보았다. 그러던 중 내가 이용하는 사이트에서 가방, 의류 할인 쿠폰이 발급되었다. 이때다 싶어서 얼른 구매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가방 구입 과정은 합리적인 고민의 시간이라기보다 정해진 답에 맞출 근거를 찾았던 과정에 가까웠다. 만족스러운 쇼핑이라 여겼지만 마음 한편에 설명하기 어려운 찝찝함이 일었다. 만약 ‘알고리즘이 추천한’ 유튜브 동영상을 클릭하지 않았다면, ‘때마침’ 할인 쿠폰을 받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우리 집에는 육아용 가방이 두 개나 있고, 출근용 가방도 있다. 부족한 수납공간은 가방 두 개를 들어 보완할 수 있을 텐데. 이런 반문은 외면한 채, 나는 새로운 가방을 사기 위해 스스로를 설득했던 게 아닐까. 이 사실을 깨닫자 의식하지 못한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를 홀려 가방을 사게 만든 건 무엇이었을까. 나는 얼마나 자주, 수많은 결정들을 나만의 선택이라고 착각하며 살아왔던 걸까.

이러한 경험은 [트렌드 코리아 2026(김난도 저)]가 말하는 제로클릭의 한 장면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늦은 저녁 치킨을 시켜 먹은 이유는 야식의 충동을 참지 못한 나의 부족함뿐만 아니라, 무심코 넘기던 쇼츠에 등장한 치킨 먹방이 내 침샘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쇼츠와 SNS의 알고리즘은 맞춤형 광고를 제안하고 이를 통해 수요를 만들어낸다. 필요한 게 아니라 사고 싶은 것을 사게 만드는 마케팅의 기본 전략은, AI 알고리즘을 만나 발전했다. 유튜브 프리미엄을 구독해 직접적인 광고를 보지 않아도 AI 알고리즘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욕망을 서서히 주입시킨다.

(* 제로클릭 : [트렌드 코리아 2026]의 키워드 중 하나로, 인공지능이 인간의 선택 경로를 설계해 인간이 스스로 클릭할 필요조차 없어진 상태를 의미)

뿐만 아니라 간단한 메일부터 복잡한 보고서 작성까지, 이미 업무의 영역에서 인공지능을 빼놓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예전에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두고 고민하며 조심스럽게 선택했지만, 이제는 AI가 긴 숙고의 시간을 무색하게 만든다. 불과 수 초 만에 훨씬 수준 높은 결과물을 제시하고, 나는 그저 그것을 복붙 하면 된다. 과정이 간결해진 만큼 숙고의 시간은 사라져 간다. 이러한 간소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인간의 주체성을 서서히 잠식할 위험을 안고 있다. AI가 작성해 준 문장이 내 진정한 의도인지, 아니면 내 생각이라 착각하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비록 부족할지언정 내가 직접 숙고하고 고민해서 결정했다면,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다가올 AI 시대의 근본적인 갈등은 기술이 제공하는 편리함과 그에 종속되어 점점 가벼워지는 인간의 주체성 사이에 놓여 있다. 이와 관련해 1973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독일의 화학자 에른트 피셔의 말이 떠오른다. “기계가 점점 더 효율적이고 완벽해질수록, 불완전함이야말로 인간의 위대함이라는 사실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인공지능의 편리함에 기댈수록, 우리는 중요한 무언가를 잃을 수 있다. 바로 틀릴 자유이다. 비록 인간의 선택과 결정이 오류투성일지라도, 부족과 불편이라는 자양분 속에서 창발적 사고가 피난다.

앞으로 인공지능은 우리 일상의 더 많은 곳으로 영토를 시나브로 넓혀갈 것이다. 편리함으로 위장한 침입으로부터 주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숙고하는 비판적 태도가 필요하다. 나는 언젠가 또 다른 가방을 사게 될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때의 선택이 ‘나’의 고민과 판단인지, 아니면 알고리즘이 설계한 결론인지 스스로에게 묻는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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