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행생활자KAI Oct 07. 2021

이 노을이 그리워 마음이 붉게 타오르는 날이 오겠지

해외 생활 적응 4단계


어쩌다보니 네 번째 드레스덴이었다.

첫 번째는 2017년 여름, 이제 막 도착한 이방인을 위한 세르지의 배려로 떠나 온 급여행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이곳에 온 게 못마땅했던 나는 주선자에게는 미안했지만 모든 것이 시들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6월의 밤이었지만 으슬으슬 추웠고 컴컴했으며 낯설었다. 2차 세계대전 폭격에도 온전히 위상을 지킨 ‘군주의 행렬’도, 바로크 양식의 걸작이라 불리는 ‘츠빙거 궁전’도, 엘베강을 바라볼 수 있는 최고의 뷰 포인트로 꼽히는 ‘브륄의 테라스’도 그 무엇도 내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괴테는 드레스덴을 ‘유럽의 테라스’라며 극찬했다는데, 대체 왜?! 무슨 근거로?! 대문호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나름 독일에서의 첫 여행이었으나 남편과 사진 한 장 찍지 않았다. 그저 엘베강 위에 희뿌옇게 떠 있던 안개 속을 훠이훠이 허우적거렸다. 외려 휘황찬란하게 반짝이는 한강이 아른아른 그리웠다. 모국어가 통하는 내 나라에서 맘 편히 돗자리 하나 툭 깔고 치맥을 배달해서 닭다리를 뜯으며 카스를 원샷하고 싶었을 뿐. 그것 뿐.


두 번째는 한국에서 온 친구와의 동행이었는데 그날도 야속하리만치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목화솜마냥 찬찬히 예쁘장하게 내리는 눈이 아닌 음습한 비와 차가운 바람을 동반한 거친 눈이었다. 독일의 가장 큰 행사라고 할 수 있는 크리스마스 마켓에, 크리스마스 케이크의 대명사인 ‘슈톨렌’의 고장이라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기괴한 날씨가 주는 불쾌함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인파에 끼여 후후 글뤼바인을 불어 마시며 마켓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었지만 좀처럼 흥이 나질 않았다. 웃고 싶지 않은데 웃어야 하는 피에로마냥 즐거운 척 위장을 했다. 여기까지 온 경비가 아까워서, 겨우 시간을 내어 독일까지 온 친구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관광객이라는 의무감에서…. 훗날 그녀역시 이날이 좋았다거나,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단다. 살 떨리게 추웠던 공기만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상하게 뼛속이 아렸고 시렸던 날이었다.


 번째는 부모님이 독일에 오셨을 이번엔 진눈깨비같은 비가 종일 내려 기분을 축축 처지게 만들었다. 보고 싶었던 가족과 함께해서 기뻤지만 1년에 2/3 이상은 이런 날씨를 이고지고 사는 나를 안쓰럽게 여기시는 엄마에게 괜스레 미안했다. 불행  다행인건 유럽의 궁전이 처음이었던 엄마는 한껏 고양되어 즐겁게 사진을 찍으셨다는 점일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불평불만이 가득한데  드레스덴을  번이나 갔느냐고 반문할  있겠지만, 날씨는 예측불허니까 제외. 내가 살고 있는 라이프치히에서 당일치기로 가기에는 가장 불거리가 많은 관광지이자, 기찻값이 비싼 독일에서 지역티켓이라는 가성비 좋은 표로 비교적 저렴하게 다녀올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이번은 다르겠지. 괜한 운에 기대를 걸어보았던 것도  2프로 정도는 작용했으리라.


특별히 좋은 기억이 없는 드레스덴. 다시는 안 갈 줄 알았던 이곳을 또 방문하게 될 줄은 몰랐다. 바야흐로 네 번째다. 얀 베르메르의 특별 전시회를 보기 위함이었는데, 베일에 싸여있던 화가의 ‘열린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여인’이 350여년 만에 복구되어 전 세계 애호가들의 발길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평소 베르메르 애호가였던 나는 ‘이건 놓칠 수 없다’며 부리나케 달려갔지만 아쉽게도 매진인 바람에 그림을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기엔 아쉬웠다.



“뭐하지?”


내 물음에 남편은 왜 그런 걸 질문 하냐며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뭐하긴. 그냥 햇볕이나 쬐는 거지.”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이 정말이지 처음으로 드레스덴에서 해가 고개를 내밀었다.(이런걸 보면 하늘이 대책 없이 무심하지는 않다.) 9월 끝자락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햇살은 잘 익어가는 사과마냥 발그레하게 눈부셨고 포슬했다. 일렁이는 그림자에 양볼이 살짝 간지러웠다.

츠빙거 궁전이 한 눈에 보이는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이따금씩 단체 관광객들이 작은 먼지를 흩날리며 캐리어를 끌고 지나갔고, 옆자리에는 노부부가 커피를 마시며 오후의 나른함을 누리고 있었다. 챙겨온 초콜릿을 하나씩 입에 물고서, 옆에 있던 노부부에게도 건넸다. 서로 마주보고 찡긋- 한 번 웃었다. 달콤했다. 남편과 지금까지 경험 한 드레스덴 중 가장 좋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네 번째 방문에 이르러서야 괴테의 찬사에 약간은 동의하게 됐달까. 보여줄 듯 말 듯 종적을 감추고 있다가 몇 번의 악천후 끝에 드디어 근사한 날씨를 보여준 이 상황은 마치 어두운 터널에서 시작해 종국에는 빛을 찾아가는 우리의 독일살이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처음 드레스덴에 왔던 날을 돌이켜보았다. 그때의 뾰로통했던 나, 잔뜩 날이 서 있던 나, 모든 것이 을씨년스럽기만했던 나를….



언젠가 ‘교차 문화 적응 이론’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해외에 살게 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초기, 새로운 문화에 대한 기대감으로 허니문기를 경험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인종차별, 언어 등 현실적인 장벽에 부딪히며 ‘과절기’를 맞닥뜨린다. 보통 1~2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현지 언어와 관습 등을 배워가면서 ‘적응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본국으로 돌아간 뒤 재적응 과정도 비슷한 형태를 보인단다.


교차문화적응이론의 U곡선



컬처쇼크라는 개념을 개척한 인류학자 칼레르보 오베르그(Kalervo Oberg, 1901~1973)  모든 과정을 제대로 통과한 사람은 ‘통합기 새로운 문화의 일부가 되면서 동시에 자신의 고유한 문화를 유지할  있게 된다고 설명한다. 물론 결코 쉽지 않은 경지일 것이다. 나됨을 오롯이 지키면서 그들과 조화를 빚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


공교롭게도 같은 장소를 일 년에 한 번씩 방문하며 ‘교차 문화 적응 단계’에 따라 달라지고 있는 내 감정을 들추어보게 됐다. 허니문기-좌절기-적응기-통합기의 순서로 보자면 허니문은 애초에 없었고, 좌절기와 적응기만을 수 십 번 오락가락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좌절기와 적응기를 거쳐 겨우내 허니문기를 맞이한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햇살이 따사로웠다.


나는  땅에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쓰러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돌이켜본다는 것은 감히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독일에서의 삶은 끊임없는 전진이었다. 한국을 떠나  목표를 이뤄야한다는 강박관념은 뒤를 돌아볼 작은 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4년이 흐르고 나서야 곱씹어  여유가 생겼다. 약간은 느긋해진 마음으로 지난날을 되돌아본다.   경험한 일을 다시 재생한다 ‘회상이란 단어가 이렇게 따뜻한 위로를  수도 있구나... 새삼 고마웠다. 테이프를 되감기 해본다. 때로 거친 포르테로, 안온한 안단테로, 경쾌한 포르테시모로 수많은 순간들이 각양각색의 음색으로 울려 퍼져나갔다. 가느다랗게 얼기설기 엮인 가을빛 사이로 지난한 날들의 음표가 넘나들었다.



그땐 그랬지,

고생 많았어,

앞으로는 더 나아질 거야.

그럼.

분명...

그럴거야!


햇살이 감귤처럼 익을 때까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하호호-깔깔낄낄-


집으로 돌아가는 .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가을의 문턱으로 노을이 내려앉는 시간을 맞이했다. 저물어 가는 태양에 대롱대롱 달린 구름이 뉘엿뉘엿 흘러갔고, 우아하게 대기권을 통과한 햇빛은 산란하여 자신이 선보일  있는 최상의 빛깔을 빚어내고 있었다. 태양은 지나간 발자취마저 경이롭구나. 과연 나는 이곳에 어떤 흔적을 남길  있을까를 잠시 떠올려봤지만 그러기엔 오렌지  융단에 둘러싸인 하늘이 너무 눈부셨다.  생각을 하는 것은  풍경에 대한 직무유기였다. 그저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주홍 빛깔물들어갔다.



먼 훗날 이 고운 빛깔이 그리워
마음이 붉게 타오르는 날도 오겠지.











매거진의 이전글 관계의 적정 온도는 몇 도일까_해외 생활 인연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