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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생활자KAI Oct 14. 2021

칸트가 낳은 오해, 독일인의 시간과 산책

약속을 잘 지킬것이라는 환상은 금물


칸트 매일 오후 3 30분이면 산책을 했다.  시간이 얼마나 정확했던지 당시 쾨니히스베르크 사람들은 그가 산책하는 시간을 보고 시계를 맞췄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칸트 덕분인지 많은 이들이 독일인은 시간 개념이 철두철미할 것이라고 오해한다. 관공서나 병원은 별개로 하고 개인의 경우 툭하면 약속을 어기고, 늦기 일쑤여서  목덜미가    넘어갈 뻔했다. 세계 어디를 가나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있기 마련이니까.(독일인이라고 다르지 않다. 환상은 금물)


칸트가 살았던 쾨니히스베르크는 현재는 독일이 아닌 러시아의 영토다. 가끔 여행서적에 칸트가 걸었다고 소개되는 하이델베르크의 [철학자의 길]과 칸트는 전혀 상관이 없다.



오히려 나는 3시 30분이라는 시간 보다 ‘산책’에 방점을 찍고 싶다. 독일인에게 산책은 매우 중요하다. 칸트만큼은 아니더라도 대부분 정해진 시간에 산보 혹은 달리기를 한다. 퇴근 후 오후 3~4시에 걷거나(믿기지 않겠지만 독일은 오후 4시가 러시아워다.), 오전 10시 정도에 아가들을 데리고 유모차를 끄는 엄마 혹은 아빠들도 보인다. 약간 이른 오전 8시 즈음이면 운동선수로 보이는 엄청난 근육질 몸매의 소유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단체 달리기를 하기도 한다.(눈이 앞뒤 좌우 360도 왕왕 돌아가는 건 나도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



그렇다 보니 서울에 살 땐 어쩌다 일요일에 한 번 게으름을 일으켜 동네 한 바퀴 겨우 돌던 나도 독일에서는 거의 매일 산책을 하게 됐다. 무엇보다 정착 기간 후 내게 가장 많이 주어진 건 시간이었고, 자연스럽게 산책이 중요한 일과로 자리를 잡았다. 그들과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출근할 일이 없으니 시간을 못 박아 두기보다, 일정 간격을 두고 변화를 주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약속하진 않았지만 산책을 하다 보니 다른 시간마다 고정적으로 조우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전 9시경 공원을 어슬렁거리다 보면 동상 앞 벤치에 앉아 신문을 보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언젠가부터 멀리서 그가 보이면 나도 모르게 과거 쾨니히스베르크 사람들처럼 시계를 봤다. ‘어머! 진짜 9시네.’ 신문 종류도 한결같다. 라이프치히 지역 신문인 ‘Leipziger Volkszeitung’. 구동독 느낌을 물씬 자아내는 동그랗고 가느다란 금테 안경을 코 중턱에 걸치고 지면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한 자 한 자 놓칠 새라 기사를 정독하시는 할아버지는 신문에 진심이었다. 구독률 저하로 경영난에 시달리는 국내 신문사에서 이 광경을 본다면 찬탄을 금하지 않았을 텐데...


오전 11시엔 쌍둥이 자매 할머니가 공원 초입에서부터 그라피티로 가득한 다리를 건너 꽃들이 만발한 분수대 앞까지 산보를 하신다. 같은 생김새, 같은 , 같은 신발지나가는 모든 이들의 관심을 끈다. 신기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걸음걸이엔 다정함이 묻어난다. 일평생 함께 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그녀들의 삶이 살풋 그려진다. 타인은 절대 이해할  없을 끊어지지 않을 유대감을 떠올려 본다. 1초의 앞서거니 뒤서거니도 없이 같은 속도로 나란히 걸어가는  사람은 심장 박동마저 동시에 움직일 것만 같았다.


코로나가 한참 심각할 ,  분이 보이지 않아 내심 걱정도 했더랬다.    파란 투피스를 똑같이 차려 입고 유유히 걸어가시는 모습을 마주쳤을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지 모른다.  분이 건강히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는 것은 오후 2시의 사나이다.  시간엔 혼자만의 계절을 사는  같은  남자가 고정적으로 등장한다. 그는 선천적으로 천하무적의 피부를 타고난 것일까. 겨울엔 춥지 않고 여름엔 덥지 않은 것일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해가 쨍쨍하나 안개가 자욱하나 날씨에 상관없이 사계절 내내 동일한 킬트를 입고 개와 함께 산책을 한다. 4년을 봤으니 가히 칸트의 후예라 칭할만하다.(킬트를 입었으니 스코틀랜드 사람인지도 모르겠지만;) 얼마나 자주 봤으면 가끔은  공간에 남자와 개가 영원히 박제되어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사이 유일하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작은 강아지에서  개로 성장한 반려견일 것이다.


그는 이따금씩 마주치는 동양 여자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을지 몰라도 나는 자주 궁금했다. 왜 같은 옷을 고수하는지, 왜 항상 이 시간에 산책을 하는지, 왜 늘 반려견과 동행하는지…. 궁금증 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숫기 없는 나는 말 한 번 붙여보지 못했다. 머릿속으로만 이러쿵저러쿵 상상의 나래를 펼쳐봤을 뿐.

‘음.. <하치 이야기>를 감명 깊게 보셨을까. 혹시 건강 상 산책을 꼭 해야 할 이유가 있는 걸까, 칸트처럼 철학자일지도 모르지’라며 “모든 생각은 걷는 자의 발끝에서 나온다"라고 했던 니체의 말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려고도 했지만 오히려 이유를 찾는 것이 ‘매일 산책’이란 이 멋진 행위에 누가 될 것만 같았다.


애초에 산책에는 특별한 연유 따위 없었을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이어져  율법과도 같은 아주 당연한 일과일 뿐인 지도. 신문에 열중하는 할아버지도, 같은 옷을 입는 쌍둥이 할머니도, 개와 동행하는 킬트의 사나이도,  시간은 얼핏 같아 보이지만 매일 다른 결을 가지고 꾸준히 그리고 천천히 자신만의 나이테를 넓혀나가고 있었다. 같은 시간, 같은 동선을 걷는다는 반복된 행위를 통해 나이테는 점점  굵어지고 점점  튼튼해질 것이다. 비슷비슷한 일상이 켜켜이 쌓여  사람의 근사한 인생이 완성된다. 이는 정형보다는 비정형을 정착보다는 유목의 삶을 꿈꾸던 내가 처음으로 질서 정연한 삶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꾸준히 그리고 천천히사회에서도 일상에서도 규칙을 세우고 지키는 사람들. 독일인의 한결같은 우직함은 노잼에 때로 답답하기까지 하지만 우리가 흔히 부러워하는 독일인의 저력을 만든 기초체력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너무 나갔나(?) 싶은 생각잠시 했다. 걷기는 사고의 주머니를 온갖 곳으로 데리고 다니기도 하니까.


매일 오후 3시 30분이면 길을 나섰던 칸트는 1804년 2월 12일. 하인에게 포도주 한 잔을 청해 마시고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산책을 떠났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Es ist gut(좋다)’이었다.


‘좋다.’ 이 말이야말로 독일인이 매일 같은 시간에 산책을 하는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주 걸어 본 사람들은 안다. 걷는 행위는 내가 나를 위무할 수 있는 최고의 행위임을.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계절을 걷다 보면 번잡한 군더더기들이 땅속으로 사라지고, 결국 ‘좋다’라는 말만 살아남아 싹을 틔운다. 그 희열에 우리는 산책에 중독된다. 역시 칸트는 괜히 위대한 철학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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