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의 평화를 기도하며
도무지 잊어지지 않는 이름이 있다. ‘무스타파.’ 우리나라의 ‘김’씨처럼 흔한 이름인지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으나, 내 기억에는 두 명의 아프가니스탄 출신 ‘무스타파’가 살고 있다.
서른의 나는 아무도 없는 곳, 그 누구의 관섭도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알 수 없는 삶의 무상함을 느껴 도망치듯 배낭을 쌌다. ‘그래 터키로 토끼는 거야.’ 늘 여행을 함께 다녔던 친구 P와 단지 나라 이름에 끌려 훌쩍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우선 터키 이스탄불에서 사프란볼루, 카파도키아까지 가기로 했다. 중간에 터미널에서 잠을 자며 7시간을 기다렸고, 버스로 10시간을 달려 도착한 카파도키아.
4세기, 극단적 고행을 추구하는 수도승들이 종교적 박해를 피해 숨어 살았던 이곳은 오늘날에는 스타워즈의 촬영장소로도 유명하다. 그 옛날 수도승들이 감행했을 극한 상황을 체험해보고자, 거의 동굴이라고 할 수 있는 전통 게스트하우스에 묵어 보기로 했다. 그곳의 이름은 묘하게도 ‘Nirvana’, 열반이었다.
멀리 한국에서 온 우리를 안내한 직원은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무스타파. 키는 한 165센티 정도 됐을까. 덩치가 외소 했고, 눈도, 코도, 입도 모든 것이 다 작았다. 어려 보였고 한편으로는 어리숙 해 보이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IS가 유럽 전체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기에 나는 그가 이슬람 국가 출신이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꺼려졌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스타파는 비수기에 방문한 여행자를 무척 반갑게 여겼고 극진히 대접해 주었다. 필요한 건 없는지, 궁금한 건 없는지, 방이 춥진 않은지를 살뜰히 챙겼다.(실제로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돌집은 미친 듯이 추웠다. 지내는 내내 돌의 틈 사이를 헤집고 들어오는 사나운 바람을 무방비 상태로 맞아야했다. 체험은 무슨 얼어 죽을 체험; 밤새도록 시린 손을 호호 불어가며 이곳을 예약한 내 손가락을 저주했다.)
살얼음 떨리는 어두컴컴한 돌집에서 이틀을 어찌어찌 버티고, 떠나기로 한 전날 밤. 무스타파는 쭈뼛쭈뼛 다가오더니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무스타파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IS뿐만 아니라 터키에는 관광객을 상대로 한 사기꾼들이 기승을 부린다는 말을 숱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느닷없는 그의 식사 제안에 편견 레이더가 미친 듯이 깜빡거린 것은 당연지사. ‘드디어 올게 왔군. 레스토랑? 무슨 꿍꿍이지? 바가지 씌우려고 그러는 거 아냐? 여자라고 만만하게 보는 거냐? 절대 안 속아 넘어간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같이 온 P는 반색을 하며 “당연히 좋지! 뭐 먹어?” 곧바로 약속을 잡는 것이었다. 동행인인 나와 상의라도 할 것이지 이 순간 그녀가 얼마나 야속했는지 모른다. 나는 시종일관 무스타파를 경계하며 피곤하다는 핑계로 말도 하지 않았고 음식도 먹는 둥 마는 둥 했으나, 그는 저녁뿐만 아니라 디저트까지 대접했다. 자신의 고향에서 자주 먹는 음식이라며 라이스 푸딩을 소개했는데 이는 심드렁하던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쌀로 만든 푸딩이 있다니! 신기해서 한 숟가락 뜨려는데 그가 말했다.
“어머니께서 자주 만들어 주시던 음식이야.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아직도 아궁이에 불을 피워 밥을 짓는데 저녁 때면 굴뚝 연기를 타고 음식 냄새가 온 동네에 진동을 해.
아... 냄새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
그 중에 가장 그리운 건 바로 이 라이스 푸딩이야.
그래서 너희한테 소개하고 싶었어.
나는 항상 엄마가 보고 싶어.”
우리에게는 땅에는 지뢰가 하늘에는 전투기가 날아다니는 나라이지만 그에게는 아련한 고향이었다. 미처 거기까지 생각이 가닿지 못했다. P까지 싸잡아 미워한 내가 계면쩍었고 그녀의 열린 마음에 경외심마저 들었다. 무스타파는 냄새로 고향을 기억하고 있었다. 해질녘 태양이 타 들어가는 냄새, 굴뚝 위로 연기가 아스라이 퍼질 때면 코끝을 스치는 구수한 밥 짓는 냄새, 영원히 잊지 못 할 엄마 냄새….
그때서야 스무살 남짓한 앳된 얼굴의 무스타파가 눈에 들어왔다. 한국이었다면 한창 대학을 다닐 나이. 연애도 하고, 공부도 하고, 하고 싶은 것이 무진장 많을 청춘. 무스타파에게 꽃다운 스물은 없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혈혈단신 타국에서 돈을 벌어야 했다. 나는 차마 라이스 푸딩을 목에 삼킬 수 없었다. 이슬람 종교에 대한 편견, 가난한 나라에 대한 선입견이 목을 옥죄여왔다. 그동안 나름 진보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했던 내가 끔찍했다. 그저 책으로만 세계정세를 읽었을 뿐이다. 말로만 인류 평화며 평등을 외쳐댔다. 실상은 편견으로 가득한 편협한 인간일 뿐이었는데…. 대놓고 말은 못했지만 미안했다. 그에 대한 의심으로 가득 찼던 이틀이 부끄러워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다짐한 차가운 동굴 속으로 숨고 만 싶었다. 더 안타까운 건 그렇다한들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무스타파의 꿈,
돈을 벌어 고향의 가족을 데려오고 싶다는
그의 꿈을 응원하는 것 밖에는…
그것 밖에는….
“우당탕탕- 드르럭 드르럭-”
무더운 여름, 어학원 맞은편 건물은 공사 중이었다. 독일은 한국처럼 35도를 육박하는 더위는 드물기에 에어컨이 없는 곳이 많다. 그날은 이상기후 때문인지 더워도 너무 더웠다. 모두가 찜기 속 찐빵처럼 땀에 눅눅해져 가고 있는 와중에 우리는 선택해야 했다. 소음을 참고 문을 계속 열어 둘 것이냐, 더위를 참고 문을 닫을 것이냐. 선생님은 거수로 결정을 하자고 했는데 거의 폭격에 맞먹는 굉음이었기에 나를 비롯한 대다수가 문을 닫는데 동의했다. 그때 내 옆에 있던 무스타파가 귓속말을 했다.
“사실 난 저 소리 아무렇지도 않아. 다들 손을 드니까 응했지만 말야. 우리나라에선 매일 총소리가 들려. 그 뿐이 아냐. 가끔은 대포소리도 들리고, 폭탄도 터지고, 하루도 조용하질 않았어. 펑-쾅! 우두두두두두-”
“…….”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하나. 딱히 대꾸할 만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많은 난민을 수용한 국가다. 그렇다 보니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등에서 온 난민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특히 어학원에는 한 반에 한 두 명은 꼭 있고, 많을 시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처음에는 쉬는 시간에도 매트를 깔고 기도를 하는 그들이 어색했고, 남편이 데려다 주고 데리러 오는 부르카를 쓴 여자들이 생경했지만 점차 익숙해져갔다. 학생들 중에는 매번 수업 시간 마다 엎드려 자거나 선생님에게 비협조적인 이도 있었으나 우리 반에서 18세로 최연소였던 무스타파는 누구보다 열심히 독일어를 배웠다. 어리다보니 귀여움을 독차지했고, 주말 그릴 등을 주최해서 친목 도모에도 톡톡한 역할을 해내는 분위기 메이커였다. 그 당시 나는 반에서 무스타파와 제일 친했는데, 늘 그가 내 옆자리에 앉기도 했거니와 터키 사건 이후 색안경을 쓰지 말자는 스스로의 다짐도 작용했던 것 같다. 종교 하나만으로 처음부터 나쁠 것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나는 첫 번째 무스타파에게 저지른 과오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총소리가 익숙해.” 이 말은 나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그는 어떻게 어린 나이에 홀로 독일에 왔을까. 얼마나 총성에 익숙해지면 귀를 찢는 듯 한 요란함이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칼같이 라마단 금식을 지키며, 쉬는 시간마저 기도로 반납하는 그들이 믿는 신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침묵이 주는 어색함도 잠시, 우리는 계속 수업 진도를 따라가야 했다. 그날은 유의어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독일어 단어 가운데 ‘See’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남성관사가 붙으면 ‘der See-호수’를, 여성관사일 경우 ‘die See-바다’를 뜻한다. 선생님은 이 두 단어를 헷갈리면 안 된다고, 시험에 자주 나온다며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했다. 바다와 호수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은 다 알 텐데 왜 저렇게 그림에 사진까지 보여주며 열심이신거지? 처음엔 의아했다. 그러나 이것은 바다와 호수를 직접 본 사람에 한해서 쉬운 개념이었다. 어학원은 세계 각국의 인종이 모여 독일어를 배우는 장소였고, 선생님은 바다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지했던 것이다. 이런 내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옆에 있던 무스타파가 말했다.
“카이, 난 있잖아. 우리 가족이 독일에 올 수만 있다면 제일 먼저 바다를 보러 가고 싶어. 여기서 북쪽으로 가면 바다가 있다지? 나는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어. 너는 본 적 있니? 진짜 그렇게 넓어?”
바다를 한 번도 본적이 없다는 말은 총소리가 익숙하다는 말보다 더 낯설었다. 아니 당황스럽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라고 자랑하는 것도 우스웠다. 바람 쐬고 싶을 때면 하릴없이 찾곤 했던 바다가 누군가에게는 미지의 세계와 같은 곳일 수 있다니. 가족과 함께 바다를 보러가는 것이 일평생의 꿈이라니. 호수처럼 크고 맑은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알 수 없는 죄책감의 심연에 빠져들었다. 이번에도 내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으니까.
바다는 아주아주아주
정말정말정말
넓고 푸르다고.
꼭 너희 가족이 다 같이
그 멋진 광경을 볼 수 있길 바란다고...
말해 줄 수밖에 없었으니까.
아마 독일에 살면서 두 번째 무스타파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 이름은 터키에서의 추억 정도로만 기억됐을 것이다. 한국에서 자국민으로 살았더라면 이토록 오랫동안 난민에 대해 생각해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목숨을 걸고 사선(死線)을 넘은, 가족과 다시 만나 알콩달콩 사는 것이 꿈인 두 무스타파. 그들은 내 일이 아니고서는 무덤덤하기 짝이 없었던 한 사람에게 팽그르르-작은 돌멩이를 던졌다. 제발 무심해지지 말아 달라고. 이슬람에 대한 편견만큼은 타파해달라고.
물론 그때도 지금도 내가 직접적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음을 안다. 그렇다고 접어둘 수만도 없다. 그들의 고통에서 끝나는 문제는 아니니까. 어쩌면 편견보다 더 무서운 것이 무관심일 테니까. 동시대를 살고 있는 세계 시민으로서 책무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공동체 의식을 넓혀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솔직히 여전히 모르겠다.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어서 글을 쓴다. 그나마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이어서.
어학원에서 무스타파를 만난 것이 2018년이었다. 그리고 2021년 그의 고향 카불에서 다시 한 번 참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안부가 궁금해 연락을 해 보려 했지만 왓츠앱에 그는 없었다. 무스타파는 잘 지낼까. 가족들은 안전할까. 바다를 봤을까. 바다는 이토록 넓은데, 이렇게 눈부신데, 그 누군가는 여전히 고통 받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파리해진다.
아프가니스탄의 평화를 기도하며, <연을 쫒는 아이>와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파르바나: 아프가니스탄의 눈물>을 추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