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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수 수 Mar 06. 2023

야한 칼럼을 은밀하게 읽는 스킬

백합미용실에서의 어떤 이중성

미용실 의자에 앉아 주렁주렁 줄이 달린 따뜻한 모자를 쓴 채 나는 불안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어림잡아도 무조건 최소 30년이 넘은 백합 미용실에는 보그나 하퍼스바자 같은 건 없다. ‘행복이 가득한 집’이라도 있으면 힙한 축에 들지만 그 또한 당연히 없다. 몇 달 지난 이슈의 여성동아나 아차산 메아리, 그날의 신문 정도다. 그런데 그 사이에 왠 GQ가 있는 게 아닌가? 물론 10개월이 훨씬 지난 이슈긴 했지만 동네 미용실에서 지큐라니.


나는 잔뜩 기대하며 목차에서 섹스 칼럼이 적힌 페이지를 잽싸게 확인 후 182 페이지를 넘겼다. 낯 뜨거운 제목이 너무 대문짝 만하게 적혀서 깜짝 놀라 얼른 두껍게 아무렇게나 잡아 훌쩍 다른 페이지를 펼쳤다. 내 뒤로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순간이 올 때까지 쓸데없는 광고 페이지를 보는 척하다 다시 앞을 넘겼다. 왼손은 가운의 통 넓은 소매로 182 페이지의 제목을 가리고 오른손 검지는 그 쓸데없는 광고 페이지를 단단히 잡고 있다. 언제든지 휙 넘길 수 있는 모든 태세를 갖춘 채 눈은 빠르게 칼럼을 읽어 나간다. 시선은 글을 향하고 있지만 그 반경에는 거울도 있다. 주시해야 한다. 꽤 복잡하고 디테일한 멀티가 가능해야 들키지 않고 읽을 수 있다.


내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 볼지도 모를 사장님과 그녀의 아들..


하지만 가장 행복하고 걱정 없는 순간에 슬픔이나 불행이 이따금씩 찾아오는 우리 인생처럼 제일 흥미로운 구간에 항상 사장님이 갑작스럽게 나타나 따뜻한 뚜껑 모자를 살짝 들춰보거나 샴푸를 하러 가야 한다. 아쉽기 그지없다.


엄마 뻘의 최은숙 사장님은 나를 항상 ‘수수하고 참한 처자’라 하시는데 수년간 본의 아니게 쌓아진 그 이미지에 먹칠과 실망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한 켠에 있다. 세상만사 다 겪은 동네 이모님들의 걸쭉한 수다를 안 듣는 척 귀를 세우고 있으면 사장님은 나를 위해 적당한 수위 조절을 하신다.


“아유 이 아줌마들아, 그런 얘기는 딴 데 가서 해. 순진한 아가씨 듣는데 못 하는 말이 없어.”


그러면 나는 한껏 순진한 아가씨의 그것처럼 맑고 순수한 눈 빛과 세상 물정 모르는 표정으로 거울을 향해 쑥스럽지만 맑은 눈빛과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여드린다. 덜 읽었지만 덮을 수밖에 없는 ‘체위의 반란과 역습’이 몹시 아쉬워도 사장님 앞에서 순진한 눈빛은 잃지 않는다.



이십 대 후반부터 히피펌을 해왔다. 즉흥적으로 몇 번의 생머리 칼단발을 하기도 했지만 이젠 허리 끝까지 오는 펌 상태로 몇 년째 유지 중이다. 너무 길어 약 5시간은 잡고 가야한다. 백합 미용실은 내가 찾은 최고의 히피펌 기술을 보유한 로컬 ‘헤어살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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