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기간을 불태우는 나의 방법
남에게 큰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긴 하지만(많이 아프긴 함) 나와 관련된 일이 아니기도 하고 그런 것들에 내 기분이 좌지우지되는 게 싫어 금세 잊는다.
멜랑콜리하고 달달한 단어들로 얼추 포장이 된, 하지만 문학적 소양은 다소 부족한 문체의 누구나 쓸 법한 새벽 감성글, 오글거리는 자기 계발류의 글이나 사랑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들을 좋아하지 않고 읽지도 않는다.
혼자선 그렇게 잘 울지만 타인 앞에서는 절대 울지 않는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나는 목 놓아 우는 방법을 몰라서 습관적으로 울음을 참으려고 애썼다.
친한 친구가 헤어진 이야기를 울면서 장황하게 늘어놓을 때 정말 그 이유에 대해 크게 관심 없고 내 앞에서 우는 건 더 불편했지만 습득한 사회성과 친구라는 명분으로 들어주고 공감봇인 척 노력했던 적이 있다. (슬픔을 이해 하지만 나는 타인 앞에서 나의 슬픔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보는 게 힘들다.) 그러다 보니 나의 감정마저 자신의 우울의 소용돌이로 함께 끌고 들어가는 성향의 사람들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끼리끼리가 이런 거구나 나의 주변 사람들을 통해 체감한다.
이런 확실했던 모든 것들에 ’사랑‘이나 ’애정‘이 들어가면 늘 예외가 된다. 그게 달갑지 않고 싫을 때가 있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론 싫지 않다. 모든 감각이 유일한 사람 한 명에게 나의 모든 레이더로 집중을 하고 있는 느낌이 불편하면서도 내 의지로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집-일-운동. 나는 최근 몇 년 간 사랑의 관계가 끝이 날 때엔 웬만하면 어떤 모임이나 약속도 잡지 않고 운동을 정말 열심히 했다.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고 내가 생각해도 최고의 방법이다. 특히 슬픔과 상실감이 더 컸던 이별의 경우엔 2시간 차고 넘치도록 주 6-7일을 지칠 듯이 운동했다. 심지어 매일 다른 루틴을 짜서 체크리스트로 만들어 갔다. 밤엔 배갯닛을 적시고 식음을 전폐하며 슬퍼했다가 그래도 아침엔 정신을 차리고 또 힘을 내 보는 것이다. 슬픔을 매일 바라보며 그렇게 하루씩 버텨내면 시간이 해결해 줬다. 사실 해결이라기보다는 감정의 우선순위를 시간이 천천히 바꿔주는 것이었겠지.
완전한 남. 타인과 타인으로 만나 의심에서 호감으로, 호감에서 존경과 사랑으로 그러다 실망과 상처가 반복되다 애증이 생기고 결국엔 끝이나 또다시 완전한 남이 되어 버리는 관계. 사랑이라 불리던 게 혐오가 되기도 하는 관계. 내 마음도 어쩔 도리가 없는 마당에 타인의 마음과 끈을 내 맘대로 묶고 풀 방법은 어디에도 없고 그로인한 상처의 예방책은 십 수년 째 나오지 않고 있다. 그래도 늘 상실의 순간들의 끝에는 맑은 정신과 근육을 얻었다.
곧 4월이다. 한 강에 꽃이 잔뜩 피기 시작했다. 탄탄한 팔이 드러나는 민소매에 고른 호흡으로 러닝을 하며 스쳐 지나가는 어떤 여자를 보며 한 겨울에 이별 후 실의에 빠져 한강을 뛰다 감기로 호되게 앓았던 게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