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일주일 만에 일어난 일
외할아버지의 스물다섯 살 때 사진을 엄마의 앨범에 수십 년, 그리고 최근 몇 년 간 내가 지갑에 넣고 다녔었다. 2015년 추석 연휴에 외가 식구들 모두 모여 점심을 먹고 나와 지갑 속 그 사진을 79세의 할아버지와 이모들에게 보여드렸다. 빼어난 외모의 할아버지의 젊었던 시절과 속절없이 지나간 세월에 대해 얘기했지만 다섯이나 되는 딸들은 각자 저들의 사는 얘기 하는 것에 더 바빠 긴 테이블 끝 벽 쪽에서 조용히 동동주 반주를 하고 계시는 자신들의 나이 든 아버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매년 모일 때마다 늘 그랬다. 사위와 딸들의 이야기에 끼지 못하는 할아버지가 안 쓰러웠던 건 나를 포함한 손녀들 두세 명.
2015년, 식당 마당에서 별 뜻 없이 내가 수십 장 찍어둔 이 사진이 8년이 지난 2023년에 영정사진이 될 줄은 몰랐다. 동네 산책을 하시다가 갑자기 숨이 막혔고 갑자기 구급차를 타서 응급실에 도착했다. 인턴, 레지던트쯤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한가득 거느리고 온 대학병원 의사는 ‘수술 중 돌아가시더라도’ 가슴을 열어봐야 한다며 87세 노인에게 가망이 없는 수술을 권했다. 가족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수술을 하면 할아버지는 절대 깨어나지 못할 거란 걸.
할아버지는 나이에 비해 정신과 말투, 자세 등 모든 게 정정한 사람이었지만 이미 통증 한 번 없이 조용히 악화된 ‘특이 케이스‘라는 심장의 상태는 수술로 어찌 되지 않을 거란 걸 모두가 직감했다. 의사는 모두가 결과를 예측하는 수술을 고민 중인 딸들에게 돌아가시더라도 지금 할 수 있는 걸 해보는 게 자식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도리가 아니겠냐는 말을 하며 응급수술을 독촉했다. 코로나로 출입이 너무 삼엄해 보호자는 지정된 단 한 명 엄마뿐이었고 이모들에게 전화를 돌리며 상황을 전달했다. 아무도 수술을 원치 않았고 할아버지의 눈과 귀와 정신이 온전할 때 남은 시간을 다 함께 정리하고 싶어 했지만 결국 할아버지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수술에 들어갔고 못 깨어나셨다.
이런 수술을 권하는 게 과연 의사의 사명인지, 늙은 환자의 가망 없는 가슴을 꼭 열어서 확인했어야 했는지, 수술대신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인도적인 권유를 할 수는 없었는지 의사도 병원도 너무 원망스럽다. 덕분에 직계 가족인 엄마를 포함한 육 남매는 임종을 보지 못했다.
이 모든 게 5일도 안 돼서 일어난 일이다. 수술로 너무 부어 마치 다른 사람 같던, 정말 얼굴이 두 배로 부어 있던 할아버지의 입관 때 얼굴이 안 잊혀진다. 발인 날 화장터에 우리 말고도 끝도 없이 운구차가 드나드는 걸 보며 같은 날에 돌아가신 분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그 많은 분들의 영정사진 중에 할아버지처럼 자연스럽게 웃고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가족들이 입을 모아 장례식 내내 나를 칭찬했다. 무려 8년 전에 찍은 저 사진이 아니었다면 언제 찍었는지도 모르는 경직된 표정의 뿌연 증명사진을 확대해서 썼을 거라고. 나이가 들 수록 자신의 사진을 남길 일이 거의 없다. 웃는 노인의 독사진을 잔뜩 찍어 둔 것. 내가 최근 10년간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 1순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의 영면에 내가 새발의 피만큼이라도 역할을 한 느낌.
제대로 된 선물이나 용돈을 드린 적도 없고 초상화를 그려드리겠다는 약속도 못 지켰다. 후회스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일주일도 안 된 시간 동안 너무 큰일이 순식간에 지나가 며칠 제대로 자지 못했다고 잠이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