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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맥스 Max Nov 11. 2019

소셜벤처를 위한 힘, 임팩트 투자

스스로 독수리를 창조하는 프로메테우스와 불, 그리고 전태일

불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의 역사학 교수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인간이 먹이사슬의 최정점으로 올라서는 핵심 단계를 '불을 길들인 것'으로 꼽는다. 


인간은 불로 인해 추위는 물론이고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 강력한 근육의 힘 등을 가진 다른 동물들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수 있게 되었고, 음식을 익혀먹게 되면서 세균과 기생충으로부터 안전을 확보하고, 음식을 소화시키는 데에 소요되는 에너지 소비를 줄여 커다란 뇌를 가질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맹수들을 피해 인간 종이 나무 밑으로 내려와 생활하게 된 것도 불의 발견이 결정적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불이라는 기술을 발견함으로써 인간의 활동 반경과 영향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불은 초기 인류가 발견한 도구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 부싯돌이나 불붙은 막대기를 가진 인간 한 명이 몇 시간 만에 숲 전체를 태울 수도 있었다. 불의 힘은 인간이 가진 신체의 형태나 구조, 힘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인간에게 불은 그 자체로 혁신적 기술이었다. 그리고 불을 길들여 인간 종에게 전파한 첫 번째 인간은 그야말로 혁신가였다. 



프로메테우스와 불

인간의 강력한 도구 '불'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에서도 가장 오래된 이야기 중 하나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인간이 불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타이탄 족의 신 '프로메테우스(Prometheus)'가 제우스로부터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는 그리스어로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의 동생은 에피메테우스(Epimetheus)로 '나중에 생각하는 사람'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그 유명한 '판도라(Pandora)의 남편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가 친숙하게 쓰고 있는 프롤로그(Prologue)의 에필로그(Epilogue)의 앞 글자인 Pro와 Epi가 같은 그리스어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노여움으로 인해 불을 빼앗긴 인간들이 어둠 속에서 추위와 공포에 떨며, 맹수들로부터 죽임을 받는 모습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제우스의 명을 거역하고 인간들에게 다시 불을 가져다주었고, 그 죄로 '프로메테우스'는 코카서스산의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 수천 년 동안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벌을 받아야 했다. 

Prometheus, Gustave Moreau, 1868.


공감과 저항의 상징, 기술의 혁신가

많은 올림포스의 신들 중에서도 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측은하게 여기고 불을 가져다주었을까? 심지어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죄로 어떤 고통을 받을 것인지를 알고서도 말이다.


첫째,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창조한 신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올림포스의 최고신에 등극한 제우스는 동물을 비롯해서 신과 비슷한 형상의 인간을 만들도록 한다. 그 명령을 받은 것이 프로메테우스 형제다. 그런데 인간을 만들 때, 동생 에피메테우스는 동물들에게 힘, 날개, 날카로운 이빨 등의 능력을 모두 주어버린다. 인간에게는 줄 수 있는 것이 남아있지 않게 되자,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다. 

Prometheus creates man from clay, Constantin Hansen, 1845.


그렇게 인간은 불을 가지고 다른 동물들 못지않은 능력을 갖게 되었지만 이내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서 불을 빼앗긴다. 인간의 창조자로서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빼앗긴 인간들이 어둠 속에서 추위와 공포에 떨며, 맹수들로부터 죽임을 받는 모습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결국 제우스의 명을 어기고 불을 인간에게 훔쳐다 준다. 


자신이 겪을 고통을 알고도 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신, 프로메테우스는 그렇게 불과 함께 최고신 제우스의 권력에 대항하는 저항의 상징이자 공감의 상징이 되었다.


둘째, 불은 인간들의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강력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불은 인간이 생존을 넘어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올라서는 발판을 마련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신화에서 불은 신의 시혜로 인간에게 주어 진 기술이지만, 불과 같은 신기술은 인류의 역사에서 기존의 구조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변화를 초래하는 신호탄이었다. 불을 갖게 된 인간은 스스로 신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첫 발자국을 뗀다.  불을 통해 신체와 힘의 한계를 뒤집은 초기 인류는 언어와 화폐와 같은 무형의 도구나 철기의 발명, 선조 기술과 나침반, 증기기관 등은 물론이고, 오늘날 인터넷, 컴퓨터, 스마트폰과 같은 기술을 만들어 엄청난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성장을 만들어왔다. 그렇게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이라는 기술을 가져다주어 인간의 삶을 바꾼 신화 속 최초의 기술혁신가가 되었다. 




나는 오늘도 프로메테우스들을 만난다. 이들은 타인과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기술 혁신이야 말로 사회혁신의 가장 강력한 도구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들은 바로 소셜벤처들이다. 현장에서 만난 소셜벤처들은 나로 하여금, 이들이 바로 오늘날의 프로메테우스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기술혁신과 사회혁신이 만나는 지점

신화 속 최초의 혁신가, 프로메테우스가 '기술'과 함께 등장한 것처럼 현장에서 만난 소셜벤처들도 기술을 강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기술이야말로 사회혁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입을 모아서 이야기한다. 꼭 인공지능이나 빅데이터, 로보틱스 등의 고난도 신기술이 아니더라도 전문성에 기반하여 혁신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면서 차별점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술혁신과 사회혁신을 구분하곤 한다. 기술혁신을 추구하는 것과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인식이 더 팽배하다. 하지만 sopoong에서 투자를 하며 만난 소셜벤처들에게는 기술혁신과 사회문제 해결이 동떨어져 있지 않았다. 


소셜벤처들은 기술을 통해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효율성과 효과성, 속도와 규모를 모두 달성할 수 있는 길이라고 이야기한다. 사회혁신은 기술을 통해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소셜벤처들은 기술혁신과 사회혁신이 만나는 지점을 끈질기게 만들어 낸다. 이들에게 기술은 사회문제 해결이라는 과녁을 향해있는 예리한 화살과 같은 것이다. 


sopoong에서 투자한 소셜벤처들에게도 기술은 누군가(someone)를 위한 도구다. 재활용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IoT 분리수거함을 만들고(오늘의분리수거), 여성들을 위한 월경컵을 출시하고(이지앤모어), 개인 신용데이터를 모아 후불제 교육금융 혁신을 만들고(학생독립만세), 음성인식 기술을 활용하여 청각장애인들에게 인공지능 문자통역솔루션을 공급하고(소보로), 발달장애인을 교육-고용하기위해 비누를 만들어 파는(동구밭) 이들은 소셜벤처라면 하이테크든 로우테크든 관계없이 기술혁신과 사회혁신이 연결되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현실을 바꾸는 데에는 거창한 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았거나 새로 등장하는 사회문제를 딱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도 충분하다. 우리 주변의 사회문제들을 모두 해결하기에 아직도 기술이 해야 할, 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 기술이 없이는 해결이 요원한 문제들도 넘친다. 기술은 혁신의 마중물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기술이 이끄는 혁신이 필요하다. 기술을 통해 사회의 혁신을 만들어내는 프로메테우스들이 필요하다. 



프로메테우스와 소셜벤처가 만나는 지점

현장에서 만난 소셜벤처들은 기술만 강조하고 있지 않았다. 신화 속 최초의 혁신가,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위해 공감하고, 저항하며 자신의 고통을 감내하고서라도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자신의 개인적 욕망 못지않게 타인과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사람들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었다. 

뉴욕 록펠러센터 앞의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Paul Manship, 1934; at Rockefeller Center, New York


어찌 보면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평범한 사람들의 욕망과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소셜벤처들은 공동체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소셜벤처들은 설사 시장이나 기회가 보이지 않더라도, 소수의 고객이나 수혜자만이 겪는 문제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시작점은 자신의 행복이었지만, 나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다 보니 사회문제 해결을 통해 다수 사회 구성원들의 행복을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로 인해서 고난을 겪게 되더라도 그들은 쉬이 자신의 길을 바꾸지 않는다. 사회혁신가들의 유난히 강한 공감능력과 사회 구조와 문제에 대한 저항의식은 그들에게 끈기를 부여한다. 


아마 그래서 일거다. 인증 사회적기업 등 소셜벤처의 생존율이 일반 벤처나 자영업에 비해서 현격하게 높은 이유 말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손 잡아야 할 것

오늘의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슬쩍 궁금함이 생기지 않는가? 바로 프로메테우스가 지금도 코카서스 산에 결박당해 있는 것일까 하는 궁금한 말이다흥미롭게도, 프로메테우스와 불에 얽힌 이야기는 '헤라클레스'의 등장으로 막을 내린다. 헤라클레스는 미래를 내다보는 프로메테우스를 풀어준다. 공감과 저항의 상징이 된 혁신가 프로메테우스는 아이러니하게도 힘과 폭력의 상징인 제우스의 아들과 손을 잡는다. (아들에 의해 풀려난 프로메테우스의 귀띔으로 제우스는 죽음을 피할 수 있었으니 헤라클레스로서는 할 일을 한 거다.) 

Prometheus and Hercules by Christian Griepenkerl.

이 완벽한 상징 속에서 나는 소셜벤처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발견한다. 바로 공감, 저항을 통해 사회를 바꿔나가려면 '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셜벤처들은 유유자적하는 것이 아니라 '힘'과 손 잡아야 한다. 그 힘은 임팩트 투자가 아닐까? 

오는 11/22일, 소풍과 손을 잡은 오늘의 프로메테우스, 전태일들이 한 무대에 선다.
이미 수백 명이 참석 신청을 했지만, 당신을 위한 자리는 넉넉하다.

::: 일시 I 2019년 11월 22일 금요일 오후 3시부터
::: 장소 I GS타워 아모리스 역삼 1층
::: 신청 I https://event-us.kr/sopoong/event/12040



이 일을 하게 되면서 외투를 꺼내 입어야 하는 시기가 오면, 생각나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바로 전태일이다. 전태일 세대도 아닌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던진 위대한 사람들 중에서도 그를 떠올리는 이유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창업가들을 만나는 것이 나의 직업이기 때문이다. 전태일의 꿈이 '대학생 친구 한 명 있었으면...'이라는 것을 많이들 알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일기장에 20페이지에 걸쳐 남아 있는 평화시장에서 피복을 생산하는 사회적 기업에 대한 구상은, 그의 진짜 꿈이 '사회적 기업가'가 되는 것이 아니었을까?를 생각해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인물을 말하다 '전태일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태일(1948. 8. 26 - 1970. 11. 13)


사회적기업가를 꿈꾸었던 전태일의 끝을 우리는 안다. 그는 '사회적 기업' 대신 '불'을 선택했다. 당시로 따지면 3천만 원의 초기 자본(2018년 기준으로 약 6.4억 원)을 구할 길이 없었던 전태일은 사회적기업가로서의 꿈을 이룰 수 없었다. 천 년 전,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인간에게 가져다주었지만, 1970년의 또 다른 프로메테우스-전태일은 스스로 불이 되었다. 


사회적 기업을 창업하고 싶었으나 자본을 구하지 못해 불에 자신을 내던질 수밖에 없었던 전태일에게는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에게 그 '힘'의 현신이 '대학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2020년을 바라보는 전태일에게 그 '힘'의 현신은 임팩트 투자가 아닌가 싶다. 


임팩트 펀드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최근을 바야흐로 임팩트 투자의 원년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내가 프로메테우스와 전태일을 떠올리는 이유는, 비즈니스를 통해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꿈을 꾸는 2020년의 프로메테우스들과 2020년의 전태일들이 '힘'을 갖도록 하는 것이 나와 임팩트 투자자들의 일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스스로 독수리를 창조하는 프로메테우스

소설 모비딕에서 주인공 이스마엘은 선원들이 고래 모비 딕에 대한 증오를 갖도록 광란을 일으키는 에이해브 선장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자신의 치열한 생각 때문에 스스로 프로메테우스가 된 인간, 당신의 심장을 영원히 쪼아 먹는 독수리, 그 독수리야말로 당신이 창조한 생명체인 것이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주었지만, 실상 가장 뛰어난 업적은 '독수리'라는 존재를 탄생시킨 것이라는 모비딕의 해석은 이전에 사회문제로 인지하지 않았던 문제들을 만들어내고,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스스로를 내던지는 소셜벤처 창업가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들은 독수리를 창조하고 스스로 프로메테우스를 자처한다. 많은 프로메테우스의 후예들이 독수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힘'을 갖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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