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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형 Dec 27. 2019

사고는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 도로 위에서

  오늘 도로에서 4중 추돌이 있었다. 네 대의 차량이 사이좋게 서로의 엉덩이에 보닛을 꼬라 박은 채 길 위에 섰다. 네 대 모두 모양이 엉망이었다. 선두의 차는 얼굴이 멀끔했지만 녀석의 엉덩이도 더럽혀지긴 마찬가지였다. 선두와 두 번째, 마지막의 차는 세단 승용차였고 세 번째 차량은 1.5톤 트럭이었다. 트럭이 가장 큰 충격을 받았는지 한쪽 바퀴가 들려 있었다. 군데군데 녹이 슬고 색이 바랜 파란색의 트럭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피해는 거의 동일했다. 왠지 좀 민망한 얼굴, 자동차로서 간직해 온 어떤 소중한 것들이 훼손된 모습. 네 대 모두 다시 길 위로 돌아오려면 많이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왜 사고가 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얌전히 서 있는 세 대의 차를 맨 뒤의 까만색 세단이 (처음으로 1억이 넘는 몸값을 갖게 된 국산차다) 잇달아 밀어붙인 것인지, 악운이 동시다발적으로 들이닥쳤는지 모를 일이었다. 혹시나 사고가 더 일어날까 봐 경찰차 두 대가 사고 현장을 앞뒤로 감쌌다. 어디선가 냄새를 맡은 렉커차 두 대가 나타나 쓰레기통 주위를 배회하는 개처럼 주춤거렸다.  

  


  운전자들은 모두 차 밖으로 나와 있었다. 여자는 중앙분리용 화단 위에 올라가 경찰과 어떤 얘기를 주고받았다. 사고 경위라도 얘기하는지 경찰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든 수첩 위에 여자의 이야기를 받아 적었다. 무엇을 감추고 있고 어떤 것을 과장하고 있는지 가늠하려는 듯 경찰의 얼굴은 신중했다. 핸드폰을 손에 쥔 남자는 폰 카메라로 최대한 사고 현장을 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진실은 희미하게 잔영만이 남았지만 남자는 뭐라도 건져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정장을 입은 꺽다리 남자는 누군가와 통화하며 울분을 토했다. 그가 가장 앞자리에 섰던 차의 주인이었다. 그는 몹시 억울하고 황당했으며 대체로 뒤의 셋 모두를 증오하는 것 같았다. 모두 하는 일은 제각각이었지만 표정만은 똑같았다. 이렇게 긴 아침이 될 줄은 몰랐다고. 정말 까맣게 몰랐다고.  

  


  사고가 난 길은 내가 출근하는 바로 그 길이었다. 그들이 사이좋은 모양으로 엉덩이에 코 박고 선 자리는 좌회전 신호를 받기 위해 매일 아침 서는 바로 그 자리였다. 만일 10분만 일찍 출근했다면, '왠지 배가 아픈데?' 갸우뚱거리며 거실 화장실 앞을 서성거리지 않았다면, 양말을 속옷 색깔에 맞출지 맨투맨 색깔에 맞출지 거울 앞에서 고민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저 엉덩이 페티시 모임에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면 사고는 필연이 아니다. 아무런 조짐도 개연성도 없이 우연히 마주치는 것 일 수도 있다. 내가 내일 갑자기 죽는다면 그것은 운명이나 부주의 때문이 아니라 전날 밤 양말을 속옷 색깔에 미리 준비해두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요즘 하루하루가 너무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것 아닐까 느끼는 날이 많았다. 평일은 그저 빨리 지나가면 좋을 날들로 주말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오늘 사고를 보며 어느 날 불현듯 찾아올지도 모를 내 삶의 끝을 실감했다. 그러니 나는 지금에 집중해야겠다.  아직 오지도 않았고 어쩌면 오지도 않을 내일을 걱정하느니 지금에 만족하며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다.  

  


  비상등을 켜고 현장을 더듬더듬 우회했다. 울분을 토하며 전화를 하던 남자가 망연자실한 얼굴 내 차를 보았다. 그의 하루는 오늘 아마 매우 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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