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모르는 척해줄 뿐
나는 그래도 나 자신을 꽤 열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 역시 세 살 이전의 기억이 없기에, 사실 세 살 때의 기억이 있는지도 불확실하다. 그렇게 굳이 기억하지 못할 텐데 좋은 곳에 갈 필요가 있을까? 괜한 욕심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아이가 있으면 확실히 둘만 지낼 때보다는 신경 쓸 것도 많고, 돈이 들어가는 일도 숨 쉬듯 발생한다. 경제적인 문제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못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고 애꿎은 축복이를 핑계로 들먹이며 좋은 경험은 나중에 기억할 수 있을 때 하자고 내 마음 한 켠으로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 의식이 조금씩 변한 계기가 있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유아기의 뇌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우리가 현생을 살아갈 때 활용하는 생각 회로는 세 살 이전에 만들어진다고 한다. 그러니 기억을 못 할지라도 무의식적으로 아이의 뇌 성장과 회로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정보를 듣고 반성을 많이 했다. 사실 기억을 못 한다고 해서 아이를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나와 같은 부모가 더러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부끄러워하지 말자. 알았으면 달라지면 된다. 이제 나는 기억은 안중에도 없고, 긍정적인 영향을 내 아이에게 줄 수만 있다면 되도록 자주 좋은 경험을 시켜주고 싶다. 그리고 기억은 내가 하면 된다. 인상 깊게 본 영화 <내 머릿속의 지우개>에서 남주가 기억을 잃어가는 여주의 고민과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한 말이 있다. "다 나한테 맡겨, 내가 네 기억이고 마음이야." 그래, 축복아, 아빠가 다 기억할게. 우리 추억은 너에게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으니, 넌 그저 즐기기만 해.
축복이를 그저 아기로만 보지 않게 된 몇 가지 사건들이 있다. 부부가 그렇듯 우리도 여느 부부와 다르지 않게 의견 다툼이 있었던 날, 하필 부모님까지 계실 때였다. 그 당시 아이와 부모님께 들려주지 않기 위해 방에서 이야기했는데, 문틈이 조금 벌어져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들어왔을 법한 상황에서, 그 문 앞에 서서 우리 이야기를 한참 듣더니 할아버지 눈치를 봤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 미안하고 축복이를 볼 면목이 없었다.
두 번째는, 장난기가 많은 나는 평소에 그 장난의 반의 반으로 줄여서 치곤 한다. 그런데 그날따라 내 기분이 너무 좋았던 걸까, 아니면 아이가 너무 예뻤던 걸까, 나는 '센' 장난들을 치기 시작했다. 착하게도 처음에는 웃으며 받아주던 아이가 시간이 갈수록 도저히 안 되겠던지 자기 엄마에게 "mayday"를 외치며 그 이후로 뭔가 공기가 달라졌다. 아이가 좋아하는 장난감으로 시선을 끌었지만, 그걸 다 꿰뚫어 보듯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아이가 기분이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장난을 과하게 쳐서 미안하다고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했다. 그러자 아이가 내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평소에 내가 사과하면 곧잘 받아주었던 아이가 그때는 달랐다. 아내가 바로 물어보았다. "지금 당장 용서해 주긴 그렇고, 하는 행동 봐서 한다는 거지?" 이러니 정말 과장 안 보태고 바로 끄덕이며 표정을 푸는 게 아닌가. 물론 끄덕인 이후에 내가 관심 끌려했던 장난감에 바로 관심을 보였다. 나에게 화가 나서 관심이 가도 애써 표현하지 않던 아이가 이제는 너무나도 컸구나. 정말 행동을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겠다고 스스로 많이 다짐했던 사건이었다.
축복이를 보고 있으면 내 모습이 많이 보인다. 그만큼 나를 많이 닮았다는 뜻인데, 조금 두려울 때가 있다. 혹시 나중에 축복이가 커서 나와 크게 다투진 않을까. 물론 부모와 자식 간의 다툼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부모와 늦게 친해진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괜스레 불안하기까지 하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축복이는 현명해서 자기 아빠를 구워삶을 거라고 애써 안심을 시키지만, 학창 시절 불같은 성격을 가졌던 아비로서는 조금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시간이 흐르고 내가 지금보다 더 늙고 쇠약해지며 혈기가 줄어든다면 그런 충돌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안도해 본다. 아니, 기도해 본다.
사진출처 : 대문 : pixabay.lite
중간 : 영화'내 머릿속의 지우개'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