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집어 드는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종종 '이 작가의 작품을 전부 읽어야겠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될 때가 있다. 올해 상반기에는 정세랑 작가가 그랬다. <옥상에서 만나요>, <이만큼 가까이>, <피프티 피플>까지 읽으면서 아직 실망한 적이 없다. 아니, 점점 더 마음에 드는 친구를 사귀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재인, 재욱, 재훈>을 전자책으로 구매해 놓은 상태로 <보건교사 안은영>을 손에 들었다.
일단 제목은 크게 매력적이지 않다. 눈에 확 띄는 직업도, 이름도 아닌 데다(김은영 이은영 박은영에 비해도 더 눈에 띄지 않는 조합이다) 그냥 학교물이겠거니 정도의 예상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작가를 믿고 일단 시작해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시 믿고 보는 작가로 올려도 충분하다는 것! 읽으면서 계속 웃고, 울고, 뿌듯한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
비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
지하 3층까지 있는 고등학교, M고.
사건사고가 많이 터지는 학교, M고.
이 학교의 보건교사 안은영은 얼핏 보면 평범을 넘어서 약간 엉뚱한 타입이다. 알고 보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영혼이라든가, 악령 등의 존재를 혼자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것들을 물리치기도 하는데 그녀의 무기는 플라스틱 총칼과 비비탄 총이다. 이게 무슨 건전한 무기란 말인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핸디캡으로 작용하는 이 사회에서 안은영은 여러 가지로 살기 어려워 보인다. 그나마 직업 선호도 상위권에 랭크되는 교사(그것도 주요 과목 교사가 아닌 보건교사)라서 조금은 나아 보인다. 그녀의 인간 충전기인 홍인표 선생 역시 얼핏 보기엔 학교 설립자의 손자이며 장차 학교를 물려받을 후계자이지만, 오토바이 사고로 한쪽 다리가 불편하다. 그리기에 따라 얼마든지 우울하게 묘사할 수 있는 조건임에도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쾌하다.
이 소설의 배경인 M 고는 애초에 비밀스러운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해방 직후에 지어진 건물인데 지하 3층까지 있지만,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지하 1층까지다. 그 아래는 쇠사슬로 봉인돼 있고 연 1회 소독을 한다. 알고 보니 그 아래는 비밀이 숨어 있는데, 거기서 불유쾌한 존재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관리하던 거였다.
자, 여기까지 읽은 당신은 '대체 청소년 판타지 소설도 아니고 이게 뭐 재밌다는 거냐!'라고 따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느꼈다면 그건 다 설명을 제대로 못한 내 탓이다. 이 소설은 그렇게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로 흘러가는 듯해도 계속해서 평범하지만 마음에 드는 포인트가 나온다.
좋아하는 동기에게 고백하려는 찰나 큰 사건이 터져 '틀렸구나'싶었지만 우연한 기회에 결국 연인이 되거나, 학교를 지키기 위해 에너지가 필요해 충전용(?)으로 자주 손을 잡다 보니 결국 사귀는 사이가 되거나, 옆 농장에서 도망 나온 아기오리를 학교에서 키우다가 결국 오리가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마스코트가 되거나.
또한 청소년 왕따나, 죽음이나, 절도, 구타 같은 심각한 문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언급하지만 그건 깊은 고민 속에 다룬, 전혀 가볍지 않은 이야기였다는 게 정말 마음에 든다. 전에 읽은 <피프티 피플>에서 극대화됐지만, 이 작가는 아무리 작은 등장인물이라도 허투루 넘기는 법이 없다. 사람 개개인이 모두 소중하고 그만의 이야기가 있다는 걸 가장 잘 느끼게 해주는 작가다.
오로지 쾌감을 위해 쓴 이야기, 그 이상
작가의 말이다.
저는 이 이야기를 오로지 쾌감을 위해 썼습니다. 한 번쯤은 그래도 되지 않을까 했습니다. 그러니 여기까지 읽으며 쾌감을 느끼지 못하셨다면 그것은 저의 실패일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정말 즐겁게 읽었다. 하지만 웃음 사이에 숨겨진 마음 찡함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찬찬히 다시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냥 가볍게 휙 웃고 넘어가지 못할 요소들이 구석구석 배치돼 있다.
'토요일의 데이트 메이트'는 놀이터에 나타나는 피 흘리는 어린이 유령 정현과 그를 보는 안은영의 이야기다. 안은영이 어른이 되어도 정현은 계속 꼬마다. 피를 흘리면서도 아파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를 끼친 적 없는 아이. 그 아이는 어쩌다 유령이 되었을까. 깊이 파고들면 마음 아파 듣기 힘든 이야기가 있을 수도 있지만, 은영이 사다준 과자를 실제로 먹지도 않으면서 먹는 소리만 내는 정현은 묘한 매력이 있다. 은영더러 '네가 우리 엄만 건 아니지?'라고 묻기도 하고.
'레이디버그 레이디'는 M 고를 졸업한 유명 펑크 가수의 입양아이자 가수인 래디가 자기 엄마가 귀신을 본다며 도움을 청하는 이야기이다. 남편이 결혼 전에 사귀었던 여자가 비극적인 사고로 죽으면서 거대한 러브스토리로 고정되었고, 그래서 안정적으로 결혼생활을 하는 부인이 오히려 가짜처럼 되어버린 상황이다. 사실 귀신은 나오지 않았지만 은영은 그럴듯한 의식을 치러주고 의뢰자의 마음에서 부담을 덜어낸다. 사람들은 실체도 없고 사실도 아닌 것에 마음을 쓰고 시간을 쓴다. 그걸 벗어날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은영은 훌륭한 치료사였다.
이 소설은 동화책에 나오는 용감한 왕자(또는 기사)가 공주를 구하고 그녀와 맺어져 보상(왕국)을 얻는 이야기와 마찬가지다. 다만 성별이 바뀌고 배경이 현대적일 뿐. 또한 도움을 받는 대상도 용감한 기사에게 큰 도움을 준다. 결코 한쪽만 능력을 발휘하는 이야기가 아니라서 더 마음에 든다.
어떤 이야기든 한쪽에 중요한 역할을 다 몰아주는 게 쓰는 입장에서는 편리하다. 상호작용을 고려해 이야기를 전개하려면 따져봐야 할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세랑 작가는 언제나 모든 등장인물에게 비중 있는 역할을 맡긴다. 그러면서도 디테일이 살아있다. 실제로 겪어보지 않았다면 알기 힘든 것들이 녹아있어서 이 이야기를 쓰면서 얼마나 많은 조사를 했을지 감탄하게 된다.
소수라고, 중요하지 않다고 대강 넘어가거나 목소리가 무시되는 건 안타깝다. 아무리 작아도, 하찮아 보여도 각자의 자리가, 역할이 있다. 정세랑 작가의 소설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소홀히 여기지 않아서 마음에 와 닿는다. 아직 읽지 못한 작품들이 더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