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다기린 Mar 02. 2019

유부남이어도 괜찮아

내겐 너무나도 충분했던 어떤 결혼한 남자


파리에서 인턴으로 두 달 동안 근무할 때 회사 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R’ 대리님이다.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나를 실연의 상실감으로부터 구출해준 사람이다. 그때 그분의 나이는 서른. 헤어진 남자친구와 같은 나이였지만 결혼 2년 차 유부남이었다.


같이 점심 먹을래요?

출근한 지 보름쯤 지났을 때였나. 나는 근무 중에 남자친구와 온라인 메신저로 헤어졌다. 말로만 듣던 텍스트 이별이었다. 며칠 동안 통화로 여러 번 다투었기로 소니, 어이가 없었다. 그와는 고작 한 달 남짓 만난 사이였지만 첫눈에 서로 반했고 파리에 가기 전에 열심히 만나자며 거의 매일 같이 데이트를 했기에 금세 가까워졌다. 파리에 와서 시차 때문에 전만큼 길게 통화하기가 어려워지자 나는 짧게라도 짬짬이 자주 연락하기를 바랐다. 급기야 연락 횟수와 마음의 정도를 저울질하기 시작한 철부지 여자친구 때문에 그는 너무 피곤했던 모양이다.


일방적으로 헤어짐을 선고받고 나자 문득 사귀기로 한 날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일 욕심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야. 그래서 일이 몰릴 때는 연락을 잘 못할 수도 있어. 이해해줄 수 있지?”


훗날 그 사람을 소개해준 친구의 정보에 따르면 야망 돋던 그는 역시나 팀장님의 눈에 띄어 승승장구 중이라고 했으니 그 말이 영 거짓은 아니었나 보다.


이렇게 메신저로 헤어지는 게 뭐냐고 가서 얼굴 보고 얘기하자고 했더니 그는 마지못해 그러자고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귀국 후에도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좀 우습긴 하지만 훤칠한 외모의 그가 퇴근 후 정장을 입은 채로 약속 장소에 나온다면 새삼 다시 반해 바짓가랑이를 잡고 싶어 질까 봐. 내가 나를 못 믿겠어서 차라리 이대로 찝찝하게 헤어진 상태가 더 낫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매가리 없이 이별을 당한 이후 한동안 우울했다. 점심시간에는 혼자 조용히 나가 발길 닿는 대로 주변을 걸었다. 그가 파리 가서 들으라고 선곡해준 노래가 가득 담긴 MP3를 수도 없이 리플레이하면서. 그렇게 혼자 청승 떨고 있는 게 안타까웠는지 하루는 R대리님이 먼저 말을 걸었다.


“오늘 점심 같이 먹을까요?”


대리님은 한국인이긴 하지만 어릴 때부터 유럽에 살아서 거의 현지인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중동에서 사업을 크게 하신다고 옆자리 여자 대리님이 알려주었었다. 그래서 우리끼린 R대리님을 ‘사우디 왕자’라고 불렀다. 여러모로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가 있는 분인 데다 항상 프랑스인 동료와 점심 식사를 하셔서 그때까지 한 번도 같이 식사를 해 본 적이 없었다.  


내 마음속의 사우디 왕자님

어색하긴 했지만 매일 먹던 샌드위치도 질려가던 참이라 따라나섰다. 그때 대리님이 데리고 갔던 가게는 셀프 도시락 가게였다. 진열대에서 먹고 싶은 요리를 몇 가지 선택하면 한 통에 담아 그람수로 가격을 받는데 가성비가 괜찮았다.


혼자 점심 먹을 때 샌드위치만 먹지 말고 이런 곳도 와 봐요.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다양하게 먹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저쪽 건너편 베이커리에 빵이 맛있어요. 아참, 우동 맛있는 집도 있는데.”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에 돌아왔는데, 대리님이 다시 나갈 채비를 하셨다. 대리님이 나가면 나는 맞은편에 있는 프랑스인과 단 둘이 남게 되는데 문제는 그 프랑스인은 내가 불어를 못한다는 것을 배려해 매우 유창하게 영어로 말을 건다는 것이었다. 나는 영문학과생이었지만 읽기 쓰기에 비해 말하기는 꽝이었다. 문학 수업만 너무 열심히 들은 탓이었을까.


“대리님, 어디 가세요?”


나도 모르게 대리님을 불러 세웠다.


“아.. ㅎㅎ 담배 한 대 피러 가려고 하는데, 따라갈래요?”

“아아.. 네네!”


사무실 건물의 1층 현관문은 굉장히 높고 크고 무거운 나무 문이다. 그 문을 열면 여름날의 깨질듯한 햇빛이 와르르 쏟아진다. 그리고 그 날 그 빛이 대리님의 긴 머리칼 사이를 투과할 때 순간 만화에서나 나올법한 반짝반짝 다이아몬드 표시가 눈 앞에 어른거렸다.


뭐지.


우스꽝스럽지만 나는 옆에서 대리님이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 얌전히 서서 기다렸다.


“아직 점심시간이 한참 남았네. 산책이라도 할래요?”


루브르 앞 피라미드를 지나 튈르리 정원으로 들어서면서 문득 오늘은 그냥 이렇게 내내 걷기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지. 왜 두근거리는거지.


거기가 파리라서 그랬는지, 대리님이 ‘사우디 왕자’였기 때문인지, 아님 그냥 너무 초라했던 그날의 점심시간에서 나를 구해준 게 고마워서인지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이 아쉬워 일부러 천천히 걸으면서 머릿속으로는 별별 상상의 나래를 다 펼쳤던 것 같다.


지금 대리님 손을 잡으면 어떻게 될까?

아 맞다. 유부남이지. 근데 와이프는 프랑스 여자라며? 손잡는 거 정도는 쿨하게 봐주지 않을까.

가만. 미쳤나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래 상상은 자유니까 혼자 생각하고 말자. 미쳤어. 진짜.


그날 이후 나는 업무 중간에 힐끗힐끗 대리님을 훔쳐보는 횟수가 늘었다. 전화가 올 때마다 영어, 불어, 스페인어를 네이티브 수준으로 구사하며 자유자재로 통화하는 게 대단해 보여서. 격자 창문을 등지고 기대 서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손 끝으로 접어 올린 셔츠 소매가 괜히 스웩 넘쳐 보여서,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인자하게 웃어주는 그 웃음이 괜히 따뜻해서.


대리님은 바로 며칠 전까지 내 남자친구였던 사람과 동갑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진짜 어른 같았고, 더 사려 깊었고, 여유가 넘쳐 보였다.


유부남이어도 괜찮은 이유

그 당시 대리님을 좋아했냐고 묻는다면 명쾌하게 ‘그렇다’라고 대답하긴 어려울 것 같다. 물론 설레긴 했다. 처음 심장이 두근거렸을 때, 그리고 손을 잡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을 때 깨달은 것이 있다.


나, 한국 가서 다른 남자 만날 수 있겠구나.

이상형과 헤어졌으니 이제 다신 그런 사람 못 만나겠구나 했는데, 이 분은 그 사람보다 잘생기지도 키가 크지도 않은데 이렇게나 매력 있잖아. 외모로는 전남친 같은 사람을 못 만날지 몰라도 분명히 있을 거야. 내가 다시 사랑할 사람.


그 순간 실연의 상처가 흉터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떨어져 나간 딱쟁이처럼 튈르리 정원의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리고 유부남을 짝사랑해버리기 전에, 금사빠라는 오명을 쓰기 전에, 내 설레는 마음은 미래의 남친에게로 미리 달려가 있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지금의 남편이라고 생각하니 뭔가 재밌다.


어느덧 인턴 근무 마지막 날. 사무실 식구 중 절반이 외국인, 나머지는 자녀가 있거나 너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분들이고 회식문화라는 것도 없어서 한데 모일 일은 없었지만 다들 개인적으로 작별인사를 해주셔서 참 감사했다. 그런데 R대리님이 자기라도 송별회를 해준다며 퇴근 후 퐁피두 센터 앞 조르주 카페에 데려갔다.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인데 왠지 유독 여럿이서 모여 찾는 느낌이라 혼자서는 매번 지나쳤던 곳이었다. 칵테일 한 잔에 아몬드가 박힌 올리브가 기본 안주로 함께 나왔다. 이 칵테일을 다 마시기 전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제가 업무에 특별히 도움을 드린 것도 없는데 모든 분들이 정말 잘 대해주셔서 예쁨만 받다가 가는 것 같아요. 특히 대리님께는 한 가지 더 감사한 게 있어요. 이런 말씀 어떻게 들리실지는 모르겠지만.. 남자친구랑 헤어지고 힘들었을 때, 대리님이 이런저런 조언도 해주시고 잘 챙겨주셨잖아요. 저 사실, 그때 대리님께 조금 설렜었어요. 그리고 대리님처럼 좀 더 어른스러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갖게 되었고요. 대리님 덕분에 다시 연애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생겼어요.”


대리님은 순간 멈칫했지만 곧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먼저, 정말 고마워요. 결혼하고 나서 누구한테 이렇게 고백 듣는 거 처음이네.”


“아니 아니.. 그런 고백은 아니고요! 무례하게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알아요. 어쨌든 나를 좋게 봐줬다니까 그것만으로도 나도 고맙다는 얘기예요. 나한테 어른스럽다고 했는데 아마 그건 내가 **씨 전남친보다 더 나은 사람이어서라기 보다는 유부남이기 때문일 거예요. 결혼하고 나니까 싱글들 세상에 좀 초연해지는 게 있어요. 사실 싱글일 때는 이런데 오면 여기저기 눈 돌아갔겠지. 그런데 상대방도 그걸 느끼는 것 같아요. 초조해 보이지 않고 안정된 느낌. 그게 어쩌면 아가씨들에게는 매력적으로 보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해요. 참 그게 쑥스러운 일인데. 우린 그냥 아저씨일 뿐이니까 말이에요. 한국에 돌아가면 꼭 멋진 사람 만나요. 유부남은 안되고! 하하.”


대리님 말대로 나는 멋진 사람을 만났고, 그 사람을 유부남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매일매일 유부남의 매력까지 더해진 그 남자를 바라보며 살고 있다.


그리고 대리님과는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후, 그러니까 작년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일화는 다른 이야기에서 풀어볼 생각이다.


Merci, 대리님!

대리님도 여전히 행복해 보이셔서 정말 좋았답니다.


작가의 이전글 나쁜 기지배, 부숴버릴 거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