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나 페란테, '글쓰기의 고통과 즐거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는 성인이 되면서 타인으로부터 나잇대별로 불리고 싶은 호칭이 달랐던 것 같다. 20대에는 칠판에 판서를 하면서 학생들을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불리고 싶어 교사가 되었다. 30대에는 교육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되고 싶어 고생 끝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40대에는 선생님들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할까라는 고민에서 교육행정가인 장학사와 지금의 학교장이 되었다.
그리고 지천명의 나이 50대에는 나와 내 주변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것이 내 꿈이 되었다.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는 행복도 있지만 고통도 수반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머릿속에 떠도는 이야기를 글로 잘 표현될 때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데, 의자에 앉아 자판에 손가락을 얹어놓고 모니터를 하염없이 쳐다만 보는 상황이 되면 달리기 시합에서 마음은 1등인데 몸이 따라주지 못하여 꼴등을 하고 있을 때의 비참함처럼더할 나위 없이 괴롭다.
이런 인지와 신체의 부조화로 고통받고 있을 때 이탈리아 나폴리 태생의 작가 엘레나 페란테가 쓴 '글쓰기의 고통과 즐거움'이란 책을 읽었다.
엘레나 페란테는 독특한 작가이다. 엘레나 페란테는 진짜 이름이 아닌 필명이다. 나도 한때(물론 지금도 약간) 유명 작가가 된다면 실명이 아닌 필명을 사용하여 신비로운(?)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페란테가 실명을 쓰지 않는 이유는 나의 이런 속물적인 것과 다르다. 페란테는 '작품만이 작가를 보여준다.'는 자신만의 소신으로 필명을 쓴다. 그래서 페란테는 인터뷰를 할 때 미디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서면으로만 한다.(책 소개글)
엘레나 페란테의 작품으로는 일명 나폴리 4부작, '나의 눈부신 친구',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작품 '어른들의 거짓된 삶'은 2022년에 넷플릭스 시리즈로 제작되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바로 '어른들의 거짓된 삶'인데, 이 책을 읽은 후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보려고 한다.)
'글쓰기의 고통과 즐거움'을 읽고 밑줄 그은 내용은 이렇다.
글쓰기가 고통인 이유
작가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감을 그것도 불시에 생각나는 글감들을 글로 표현해야 하는 직업이다. 하지만 이 과정이 매우 고통스럽다("작가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대상을 연필을 쥔 '손으로 잡아서' 종이 위에 문자로 옮겨 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영감과 글감이 사라지기 전에 글로 표현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어서 금방 사라지기 때문이다. 또한 생각할 때는 또렷한 이야기가 글을 쓸 때는 희미해지는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글쓰기의 속도는 뇌의 파장을 따라잡기에는 너무나 느립니다. 글자가 증가하는 속도는 너무 느려서 과거를 붙잡지 못합니다. 글을 쓰는 동안 '글'은 과거가 되고, 그 과정에서 많은 내용이 유실됩니다.").
작가는 글쓰기는 언제나 과거형이라고 말한다. 현재형인 글쓰기는 과거형인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야기(작가는 이를 '생각과 환상'이라고 표현함)를 표현하는 작업이므로 기억이 희미해지고 왜곡된다고 말한다("글쓰기가 이토록 힘든 이유는(작가가 한 글자 한 글자 글을 써 내려가고 있는 순간까지 포함한) 현재가 '생각-환상'은 글쓰기 전에 떠오르는 것이므로, 언제나 과거일 수밖에 없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글쓰기는 지금의 나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인격체의 활동이다.
페란테는 글쓰기란 현재의 나와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 인격체의 활동이라고 말한다("완전히 독립된 인격체가 자신의 본체와 완전히 분리된 상태로 극도로 집중해서 글을 쓰고 있는 이미지를 저는 지금도 매우 좋아합니다.").
글을 쓰는 순간은 지금의 나가 아닌 또 다른 자아를 지닌 인격체가 되며 작가 자신도 글 쓰는 순간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주장한다("중요한 것은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작가인 저마저도 제 정체성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페란테는 이와 같은 글을 쓸 때의 상태에 대해 버니지아 울프의 말을 인용한다.
"문학 작품이 날 것에서 생성될 수 있다는 생각은 오판이다. 문학 작품을 쓰려면 자신을 외제화할 수 있어야 한다. 글 쓰는 이는 자신을 타자화할 수 있어야 한다."(버지니아 울프)
즉 작가는 글을 쓸 때 현재의 나의 상태, 나의 정체성에 종속되지 말아야 하며 자신을 타자화함으로써 수많은 실제의 삶의 방식에서 헤매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여백과 받아쓰기'이다.
"하얀 공책에는 검은색 가로선뿐만 아니라 빨간색 선이 세로로 공책 양옆 가장자리에 그어져 있었는데, 학생들은 그 두 선 안에 글씨를 써야 했습니다. 저는 그 빨간색 경계선을 지키는 것이 정말 힘들었습니다. 세로선은 글씨가 경계를 벗어나면 혼이 난다는 경고의 의미로 일부러 빨간색으로 그어져 있었습니다. ...(중략)... 하도 지적을 받다 보니, 빨간색 선 밖의 여백을 침범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박여서 그런 공책을 사용하지 않게 된 지 수년이 지난 후에도 빨간 세로줄의 존재가 위협적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이 책의 역자(김지우)는 이렇게 말한다.
'페란테는 작가로서 자신이 평생 (여백을 지키려는) 순응적인 자아와 (여백을 침범하려는) 충동적인 자아 사이에 갈등했다.' '여백은 순응적인 글쓰기와 충동적인 글쓰기를 경계 짓는 기준으로 두 작법 사에서 균형을 잡는 능력을 의미한다. 받아쓰기는 영감이 들려주는 목소리를 놓치지 않고 빠르게 글로 형상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페란테는 이 두 능력이야말로 작가가 가져야 할 핵심 역량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작가의 또 다른 작품 '어른들의 거짓된 삶'을 읽고 있는 중이다.
나는 소설 특히 연애 소설책은 잘 읽지 않는데, 이 책은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고 있다.
재미있는 페란테의 또 다른 책 '어른들이 거짓된 삶'을 조만간 소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