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하면 열등감 같은 나만의 기억이 있다.
중학생 때의 일이다.
바닷가 촌놈이 도시로 유학을 갔다. 나는 외삼촌 댁에서 유학생활을 했는데 바로 아랫집에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또래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와는 등하교를 같이 하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어느 날 친구의 초대를 받아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중학생인 나는 집 구경을 하면서 엄청난 문화적, 경제적 충격을 받았다. 거실 벽면에 근사한 모자를 쓴 친구 아버지의 사진 밑에는 '서울대학교 졸업'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고, 사진 바로 아래에는 TV에서만 봤던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친구는 내게 그 컴퓨터로 당시 최고로 유행했던 갤러그 게임을 시켜주었다. 그날 이후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다'는 순진한 나의 생각은 사라졌다.
40대 초반의 일이다.
나는 박사과정에 들어간 지 6년 만에 학위를 받았다. 아이들에게 윤리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이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되고 싶었다. 학위를 취득하고 보니 대학에서 더 큰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전문가로서 학술지에 논문을 차곡차곡 발표했다. 각종 학회 모임도 빠짐없이 나갔다. 내 연구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한 후, 대학 교수 공개 채용에 지원을 했다. 물론 모두 불합격이었다. 특히 단 두 명만 올라가는 최종 면접시험에 두 차례나 올라갔지만 보기 좋게 떨어졌다. 공교롭게도 모두 서울대학교 졸업생이 최종 합격하였다. 당연히 내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떨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왠지 모를 이 씁쓸함은 감출 수가 없다. 물론 지금 나는 그 당시 결과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도 부러워하지도 않는다.
"교장 선생님, 이번에 수시모집으로 서울대학교에 4명이 합격했습니다. 이 중 한 명은 서울대 의대에 합격했습니다."
"잘 됐군요. 선생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전히 대한민국은 고등학교 평가를 서울대 합격생 숫자로 판단한다. 서울대에 많이 합격하면 좋은 고등학교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저 그런 학교로 평가받는다. 언론에서도 부추긴다. 수능 만점 받은 학생이 서울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느냐 못하느냐고 뉴스거리다. 국공립학교에서는 더 이상 학교정문 현수막에 대학입시 결과를 홍보하지 않은지 오래됐다. 하지만 사교육 시장은 여전히 열을 올리고 있다.
학교는 소위 SKY 대학에 합격한 소수의 학생들만을 위한 배움터가 아니다. 서울대 합격 숫자를 보고 누구는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하겠지만 다수의 학생들은 자괴감에 빠질 수 있다. 비록 서울대에 진학하지 못했더라도 자신의 진로와 적성에 맞게 대학에 진학했다면 그 학생에게는 그것이 바로 최고로 좋은 서울대인 것이다.
“그래 축하한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너희들이 서울대학교에 합격한 것이 누구 덕분이지?”
서울대 합격생들이 교장실로 찾아왔다.
“교장 선생님 덕분입니다.”
사회생활 잘하게 생긴 녀석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그 이 녀석아! 물론 너희들이 열심히 해서 합격했겠지만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다른 학생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결과가 생긴 거란다. 기꺼이 이분들이 너희들의 배경이 되어주었기 때문임을 잊지 말아라. 결코 너희들 혼자 잘 나서 그런 것이 아니란다. 나중에 너희들이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후 기꺼이 다른 사람들의 행복과 성공을 위해 배경이 되어주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아이들의 귀에는 교장의 말이 꼰대의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학생들이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작가 안도현의 말을 알려주었다. 언젠가는 학생들이 내가 한 말을 기억할 날이 오리라는 믿음을 갖고...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나 아닌 것들의 배경이 된다는 뜻이지.
배경이란 뭐죠?
내가 지금 여기서 너를 감싸고 있는 것,
나는 여기 있음으로 해서 너의 배경이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