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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필 May 08. 2024

오펜하이머

얼마전, 넷플릭스에 오펜하이머가 떴다. 봐야지 봐야지 하다가 지난 주말에 보기 시작했다. 3시간의 긴 영화고 바쁜 일정 때문에 일요일에 절반, 월요일 나머지 절반을 보았다. 극찬하는 의견을 많이 접했다. 막상 보니 아바타가 처음 나왔울 때 정도의 놀라움과 재미는 아니었다. 둘은 주제는 비슷하지만 아바타와 오펜아이머의 차이는 스타워즈와 히틀러 다큐 차이만큼이나 크다. 그러니 같은 기대를 하는 것은 어리석다.


구성이 단순하고 선명하다. 원자폭탄 개발이라는 소재를 통해 전체주의, 민주주의, 반공주의, 자유주의적 태도를 말한다. 오펜하이머의 안보 의식 검증이라는 상황에 처한 한 사람의 익숙한 장면을 통해 현대사의 속살을 보여준다. 오펜하이머의 모순, 이중, 난해한 얼굴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한다. 영화의 결말에서는 우리 문명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되묻게 된다.


깊고 넓은 생각을 가진 현명한 독자는 영화를 통해 일상과 문명의 많은 영역의 작동방식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될 것이고, 바쁜 일상을 부유하는 정신 세계를 가진 단순한 독자들도 ‘공멸하는 갈등이냐 공존하는 갈등이냐?’라는 묵직한 메시지를 가슴에 담을 것이다.  이도저도 아니더라도 인류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원자폭탄 개발을 관념이 아닌 구체적인 현실 사건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볼 가치가 있다. 아니 봐야 한다.


새로운 주제, 새로운 내용은 없다. 하지만 닳고 닳은 주제라 해서 관심 가질 필요가 없다 여기면 삶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무너진다. 문명도 마찬가지다. 삶은 앎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앎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시작이란 진정한 앎이다. 시작이란 앎의 실천이다, 시작이란 알기 위한 행동이다. 시작이란 행동하다 뭔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시작도 못하고 죽는 삶들이 얼마나 많은가? 영화를 만들기 전에, 영화를 만들며 놀란 감독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너무나 잘 알고, 너무나 많이 들어서 듣자마자 고개를 돌리는 이런 식상한 주제로 영화를 만들어야 하나? 만든다면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수많은 고민들이 영화에 녹아있는 듯하다.


일본에 원폭을 투하한 후, 참상이 기록된 영상을 원폭 개발자들이 보는 장면이 계속 떠오른다. 영화에서는 원폭 희생자들의 모습을 단 한 컷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 부분이 인상적이다. 이 부분에서 앞서 언급한 놀란 감독의 고민을 읽었다. 수십년 반복되어 이미 다 알고 있는 주제, 내용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고민에 대한 대답같았다.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보여주는 선택을 한 것이다. 관심과 인정을 받고 기회를 만들기 위해 전쟁처럼 다투며 뭔가에 대해 끝없이 잘 말해야 하는 시대다. 그렇지 않으면 소외되고 도태되고 말없이 사라진다. 낚시 미끼를 물듯 상대가 나의 말에 반응하고 인정해 주지 않으면 삶이 고단하고 슬프다 느낀다. 원자단위 연쇄폭발처럼 고단함과 슬픔은 분노로 이어진다. 그래서 삶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처연해진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법을 배워야겠다. 기다림을 배워야겠다. 기다림이 생각보다 너무 길더라도 기다림만으로도 의미를 느낄 수 있는 태도를 배워야겠다. 그렇게 살면 삶은 전쟁같지 않을 것 같다. 멀리 내다보는 그런 사람들이 정치를 하면 전쟁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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