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지식’이라는 단어와 ‘앎’이라는 단어를 똑같은 뜻으로 사용한다.
지식의 사전적 의미는,
1. 교육이나 경험, 또는 연구를 통해 얻은 체계화된 인식의 총체
2. 사물이나 상황에 대한 정보
3. 인식에 의하여 얻어진 성과
라고 나와 있다. 세 가지 뜻풀이를 통해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겠는가?
바로 연결성이다. 체계화, 확장된 정보 파악 능력, 인식의 성과 등은
모두 연결성을 기반으로 한다.
지식의 연결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시간적 의미와 비시간적 의미다.
시간적 의미란 인과관계에 관한 것이다.
특정 주식 종목을 매입함으로 인해서 대박을 터뜨릴 거라는 기대가 대표적이다.
이때 해당 종목을 왜 사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지식이다.
이런 경우 지식은 미래라는 시간으로 연결된다.
지식의 효용성은 현재 시점이 아니라, 매입 후 주식이 오르는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미래의 사건의 결과를 기준으로 의미 있는 지식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게 된다.
이처럼 시간의 흐름이 적용되지 않으면 의미 없는 지식을 시간성 지식이라고 한다.
지금 알고 있는 것, 그래서 지금의 생각과 행동으로 인해 미래의 일을 예측하는 것은 대표적 지식의 효용성이다.
하지만, ‘안다’는 것의 목적이 ‘예측’이 되면 앎은 위태해진다.
세상은 개인이 아는대로 펼쳐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개인이 무지해서라기보다는 세상은 셀 수 없는 수많은 변수들의 서로 춤추며 만드는 상호작용의 향연이기 때문이다.
비시간적 연결성 지식은 수학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시간을 개념을 적용하지 않아도 지식은 그 자체로 유효하다. 경제지식, 경영지식 같은 것은 현실에 대입해서 결과를 보는 시간의 경과를 통해서 의미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판단된다.
일상에서 ”너 그거 아니?“라고 물을 때 지칭하는 지식 혹은 앎은 연결성을 지닌 체계화된 지식이 아니라 일회성 단편적 지식인 경우가 많다.(대체로 사건사고다.) 하지만, 단편적 지식을 통해서도 다른 지식과 경험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인식의 폭을 확장시킬 수 있다면 앎은 더욱 확장되고, 지식은 더욱 체계화될 것이다. 이를 접근을 통찰이라고 한다. 통찰이란 앎의 연결성에 관한 것이다. 연결의 구조가 일정한 흐름과 체계를 갖추면 지식 체계, 인식의 체계라 부를 수 있다.
삶의 재미는 지식과 앎을 통해 예측대로 되는 걸 보는 것이 아니다.
지식의 목적이 예측이 되면 지식도 삶도 위태로워진다.
삶의 진짜 즐거움은 뜻대로 되지 않음이다.
인간이 진정으로 배우는 유일한 상황은 뜻대로 되지 않은 상황을 통해서다.
앎이 예측의 수단이 아니라, 배움의 도구가 되면 앎의 과정은 즐거워진다.
알고 있든, 모르든 상관없이 더 잘 알기 위해 이미 알고 있는 앎을 도구로 삼을 때 일과 삶은 즐거워진다.
지식은 앎은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배움을 위한 도구다.
배움이란 인과관계 기반의 다중 연결성이다.
폐쇄적 단위는 연결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나와 타자를 부정하고 비판하는 태도는 앎을 향해 나아가지 못한다.
진정한 지식의 시작은 타자에 대한 긍정이다.
다른 말로 ‘호기심’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