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한 초등학교에서 바다에서 학생들에게 생존수영을 가르치려 했는데, 학부모의 격렬한 반발로 무산되었다 한다. 바다에서 생존수영 교육을 하면 위험하다는 이유였다. 생존수영은 안전한 실내수영장에서 가르쳐야 한단다. 자녀의 안전을 생각하는 부모의 사랑이 특이점을 넘어선 것 같다. 바다와 실내수영장은 차원이 다르다. 염소가 풀린 민물과 짠물의 차이가 아니다. 바다는 끝없는 심연의 공포가 엄습한다. 실내수영장에서 날고 기는 수영인도 출렁이는 파도가 얼굴을 덮치면 맨붕에 빠진다. 실내수영장에서 온갖 영법으로 쉬지 않고 2킬로 넘게 수영하는 고수 수영인도 바다에서는 한 순간에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그만큼 실내수영장과 바다는 다르다. 학부모들은 그 사실을 안다. 그래서 자녀들이 그 위험한 바다에서 생존수영을 하는 것을 결사 반대한 것이다. 마음은 이해된다.
한 치의 위험함, 불확실성이 없는 반도체 공장 크린룸처럼 안정적인 환경 속에서 자란 자녀의 운명은 둘 중 하나다. 평생 바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삶, 어쩌다 바다에 빠지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삶. 바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아이가 바라보는 바다는 공포감으로 다가올지, 경외감으로 다가올지는 모르겠으나 하나 확실 건 뜻하지 않게 바다에 빠진다면 살 확율이 낮다. 교육의 목적은 아이가 살아가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살아가다 뜻하지 않게 삶이 폐허가 되었을때 그 폐허 속에서 절망하고 바다에 몸을 던지는 아이가 아니라, 희망이 보이지 않는 폐허 속에서 살아가고, 폐허를 복구하는 힘을 가진 아이가 되길 바란다. 좋은 대학을 가서 의사, 검사가 되는 것보다 살아가다 힘들때 살아내는 힘을 가진 아이, 삶의 의미를 아는 아이로 키워내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폭탄은 어디에나 있다. 살다보면 삶의 무대에 폭탄이 떨어진다. 일상이 폐허가 된다. 폐허 속 두 인간을 생각한다. 폐허 속에서 절망하는 인간, 폐허 속에서 희망을 가지는 인간. 삶이 언제든 폐허가 될 수 있고, 폐허가 되더라도 다시 아름다운 삶으로 복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자. 그런 사람이 되도록 돕는 교육이 필요한 시대다. 불확실성의 시대의 교육은 불확실성을 전염병 대하듯 가르치기보다는 불확실성 속에서 의미 있게 잘 살아가는 법을 찾게 도와줘야 한다. 바다 생존수영은 그런 의미다. 바다 생존수영을 거부하는 학부모,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본다.
그제 히로시마에 왔다. 폐허였던 도시를 좋아한다. 경외감이 들기 때문이다. 히로시마는 드레즈덴보다 더 좋다. 한때 번성했던 도시, 폐허가 된 도시, 다시 복구된 도시를 통해 삶을 배운다. 도시의 운명은 사람의 운명과 닮은 듯하다. 사람은 도시 속에서 살아가니 당연한 일 아닌가 싶다. 폐허를 두려워하기보다 폐허를 만들지 않기를, 폐허가 되더라도 폐허를 딛고 일어서기를 바란다. 그럴려면 바다수영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