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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로 Jun 21. 2021

오늘은 커피 대신 차를 한 번 먹어보고 싶었을 뿐인데

티타임

아침 당번이라 회사에 일찍 와서 아침 연수까지 시간이 삼십 분 정도 남길래 차를 마시러 스타벅스에 내려왔다. 지갑을 갖고 내려올까 하다가 핸드폰으로 결제 가능한 스타벅스 카드에 돈이 있기도 하고, 혹 모자랄지라도 모바일로 충전이 되기 때문에, 목적지가 확실한 날이니만큼 그냥 핸드폰만 들고 가기로 했다. 보고 있는 책에다가 핸드폰만 들고 가벼운 마음으로 내려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입구로 들어서면서 뭘 먹을까 고민했는데 앱을 켜니 스벅 카드로 레몬진저차이티를 마시면 적립 별을 두 개를 주는 프로모션을 하고 있다. 음 어제부터 목이 간질하니 감기 기운도 있는데, 이걸 마셔야겠다. 오! 마침 이건 프리퀀시 프로모션 특별 음료이기도 하잖아! 좋네 좋아!


사람이 없어 계산대로 직행하니 직원이 날보고 반갑게 인사를 한다.눈인사로 받고는 카드를 열어 잔액을 봤더니 3천 원밖에 남지 않았다. 등록된 모바일카드로 충전을 하면 되는데, 그 순간 어제저녁에 분실 신고한 카드가 생각이 났다. 분실 신고한 카드 외에는 ISP가 없어 충전이 불가능하다. 아까 인사한 종업원이 계속 쳐다보고 있다. 일단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뒤로 자연스럽게 물러나서는 돌아서 교보타워 지점 CD기로 향했다. 나는 (어쩐지 이런 경우가 많아) 다행히 무카드 인출 서비스가 등록되어있다.


만원을 출금하여 달랑달랑 들고 가 내밀며 레몬진저차이티를 달라고 했다. 난데없는 현금에 현금영수증까지 입력하고 잔돈 4200원을 받았다. 컵을 뭘로 하냐고 묻는데, 30여분 책을 읽다 갈 것이니 머그컵으로 달라고 했다. 최근 매장에 머무르는 손님이 종이컵을 사용하는 것은 커피점과 고객 모두에게 부담스러운 일이 되었다. 잠시 책을 펼쳤다가 진동벨이 울려 차를 받으러 갔다. 어마 무시한 사이즈의 머그컵에 티백이 돌돌 말려 뜨거운 김이 솔솔 나고 있다. 차가 엄청 뜨겁고 무거워 그런지 덜어먹으라고 왼쪽에 작은 종이컵이 하나 놓여있다.

너무 뜨거운 차를 마시는 것은 식도에 좋지 않다고 들었다. 저 거대한 머그컵 채로 마시면 아무리 조심해도 식도는커녕 혀를 먼저 데일 것이다. 그러니 아무래도 작은 잔에 덜어먹는 것이 편하긴 하다. 그러나 그렇다면, 환경보호를 위해 굳이 머그컵에 담아달라고 한 의미가 있는 건가..?

이런 잡생각을 하며 머그컵에 있는 차를 작은 종이컵에 요령껏 옮겨 담는 중이었다. 아,, 실패다. 작은 종이컵만큼의 양을 쟁반에 흘린 것이다. 나름 컵끼리 더는 것을 잘하는 편이라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이건 누가 하더라도 십중팔구 실패할 각이다. 머그컵이 너무 무겁고 물의 양이 많으며 컵의 가장자리가 날렵하지 못한데 비해, 종이컵은 너무 가볍고 작아 금세 넘쳐날 것만 같아 과감하게 따를 수가 없다. 이미 흘린 걸 어쩌랴.. 그냥 두고, 작은 종이컵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두 모금쯤 마셨나, 벌써 바닥이 났다. 보던 책을 책을 소파에 엎어두고 오른 속으로 머그컵을 들어 왼손에 든 종이컵에 다시 한번 따랐다. 또 반은 담고 반은 흘린 것 같다. 쟁반에 물이 흥건하다.

세 번째 따랐을 때 나는 종이컵에 차를 따라 마시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이건 책을 보는 건지, 차를 마시는 건지, 물놀이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컵 채로 먹는 게 차라리 낫겠다 싶어서 이제 반쯤밖에 남지 않은, 적당히 식은 차가 담긴 머그컵을 양손바닥으로 감싸 안고 등받이로 몸을 기대는 순간, 무릎에 올려놓았던 펼쳐진 책장에 물방울이 똑 떨어졌다. 쟁반에 이미 홍수가 났으니 그위에 올려져 있던 머그컵이라고 무사했으랴..

책장에 묻은 물방울은 재빨리 덜어내야 덜 우글거리게 되는데 냅킨은 안 보이고, 근처에 보이는 빈 종이는 아까 그 영수증밖에 없었다. 급한 대로 영수증을 들었는데 그 아래 차곡차곡 쌓여있던 천 원짜리가 한 장 팔랑 날리면서 창문 곁 물 빠짐 난간 사이로 쏙~

마치 나비가 날갯짓하는 것 같은 우아한 팔랑임이었다.

난간 틈에 손가락도 안 들어가고, 직원한테 말해볼까도 생각했는데, 아까 카드에 잔액이 없어 뒷걸음질 치던 생각도 나면서 약간 주저하는 사이 시간이 8시 27분이 되었다. 연수가 30분부터 시작이다. 하는 수없이 자리를 접고 일어났다.

올라오는 길에 생각이 추가로 들었다. 만원을 그냥 카드에 충전해서 샀으면 잔돈도 없고 천 원짜리가 난간 틈에 빠질 일도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현금으로 샀으니 별 2개 준다는 혜택도 못 받았네. 난 도대체 뭘 한 거지.

ps.

점심시간쯤 되었나. 아침의 일이 하도 황당해서 옆 직원에게 얘기했더니 막 웃으면서 함께 천원짜리를 구출하러 가자고 했다. 30cm 자 한쪽 끝에다가 끈적한 면이 겉을 향하게 스카치테이프를 둘둘 말아 도구를 준비했다. 일부러 커피점 바깥에서부터 동태를 살피며 들어갔는데 아까 그 자리에 여자 둘이 앉아있다. 이따 다시 올까 했더니, 옆 직원이 자기가 나서서 말해주겠다고 한다. 아냐. 그냥 내가 할게


"저기요, 제가 아까 여기 좀 두고 간 물건(?)이 있어서요"

"아 그러세요? 네네, 비켜드릴게요"


두 분 다 일어나 소파까지 친히 옮겨주는 정성에 조금 다급해졌다. 나는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아까 그 난간 틈으로 자를 쏙 넣어 조준한 지 3초도 안되어 천원짜리를 떡 붙여서 건져냈다. 마치 어릴 적 하던 자석낚시처럼. 너무 금세 척 붙여서 올라오는 게 너무 웃기고 희한하여 옆에 있던 두 여자는 어안이 벙벙해졌고, 나랑 같이 간 직원은 얼굴은 돌렸지만 끅끅거리며 웃고 있는 게 보였다. 물건이래 놓고는 막상 천원짜리 돈을 건져낸 것이 민망해진 나도 감사하다며 그 여자분께 꾸벅 인사했는데 한분이 같이 웃으면서 덧붙였다.

" 그 물건, 제가 먼저 봤어야 했는데 아쉽네요"

다시는 여기서 차이티 머그컵에 먹나 봐라.



ps2..

왼쪽에 놓여있던 작은 종이컵은 차가 엄청 뜨겁고 무거우니 덜어먹으라고 준 것이 아니라 티백을 다 우리면 빼놓으라고 주는 티 트레이였다는 사실을, 이 글을 쓰고 나서 친구들이 댓글을 달아주어 알게 되었다. 겪은 일이 웃기고 황당하여 글을 썼는데, 가장 큰 원인은 애초에 따로 있었다는 놀라움!! 쓰지 않았으면 계속 몰랐을 터이니 이 또한 글쓰기의 선물이다. 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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