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재판'이라는 게임을 좋아한다. 첫 시리즈가 나온 지 20년도 넘어가는 법정 추리게임이다. 주인공 변호사가 불리한 상황에 놓인 의뢰인을 맡고, 질 것 같은 상황을 역전시켜나가는 게 주요 스토리다. 여러 시리즈가 나오면서 이런저런 변주가 있었지만 기본 골자만큼은 한 번도 바뀐 적 없다.
시리즈를 관통하는 명대사가 있다. 주인공 변호사 나루호도는 법정을 시작할 때마다 궁지에 몰린다. 살해 현장에서 피고인이 사진에 찍혔다던가, 결정적 증인이 있다던가... 당장 유죄를 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증거품과 심문만으로 무죄를 끌어내야 한다. 몇 번씩이고 좌절하는 나루호도를 지탱하는 건 스승 치히로가 해준 한 마디다.
"변호사는 위기일수록 뻔뻔하게 웃을 줄 알아야 해"
불리한 상황이지만 언제라도 비장의 수가 있는 듯, 나를 몰아붙이는 당신에게 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웃어야 한다니. 실제 법정에서 저러진 않겠다 싶다가도, 어느 곳에서, 어떤 사람들은 저런 마인드로 버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수습을 마치고 부동산팀에 배정받은 지가 벌써 4개월이 되어 간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처음 전출 때만 해도 난 부동산 문외한에 가까웠다. 임대차3법이 뭔지도 잘 모르던 초짜가 기사는커녕 뭘 알려줄 수나 있나 당혹감도 컸다. 선배들은 '당장 무리할 필욘 없다'라고 배려해주셨지만, 무작정 배려만 받을 수 없는 눈치에 부담감이 컸다.
산업부에서 가장 중요한 취재는 사람 만나기다. 취재원을 만나면서 이야기를 듣고 정보를 얻고 인사이트를 기르기. 약속이야 잡을 순 있지만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할지는 항상 스트레스였다. 안 좋은 뉴스가 돈으로 직결되는 산업부에서 초짜 기자를 위한 정보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밥 먹는 내내 신변잡기 이야기만 하다가 건진 게 없어 좌절하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네가 아는 만큼만 얘기해주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전문가를 만날 땐 한계를 절감했다. '아는 게 없으니 뭘 얘기해줄 게 없다'며 대놓고 무시하는 취재원과 헤어졌을 땐 마시고 있던 커피가 유난히 씁쓸했다.
몇 번 무시를 당하고 나니 생존 전략이 필요했다. 약한 모습 보이면 먼저 지고 가는 판이라는 게 나름의 결론이었다. 어차피 드러날 밑천이지만 굳이 먼저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질 확률이 더 높은 게임이지만 적어도 버티다 지고 싶었다. 뻔뻔하게 웃던 나루호도가 생각난 건 결코 우연은 아닐 거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몇 번 씩이고 자신만만하게 웃던 이유가 있었구나. 질 땐 지더라도 버티자는 오기와 나를 지키려는 자존심이 섞인 그 무언가였다.
정보 하나를 얻기 위해 얼굴 표정까지 고민하고 있다니. '뻔뻔하게 웃어라'는 말을 보고 어딘가의 어느 누구를 생각했던 것처럼, 오늘도 많은 곳에서 비슷하지만 또 다른 고민들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