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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해여자 Apr 25. 2024

只今지금

하는 것도 아니고 보이는 것쯤 어떠냐며
남은 것이라고는 어디까지 내어줄 것인가에 대한 결단밖에 없는 듯이.

이십 대일 때는 누구의 뮤즈가 되는 일이 낭만적이다 생각했지만
지금은 내가 글이 되는 것보다
나의 글을 이루는 것이 더 우선이라
감히, 감히, 다투는 마음이 일어날까 저어 되고

글이라는 것이 얼마나 매섭고도 따사로운지를 알기에
벌벌 떨고 두려워하나 매달리고 붙잡게 될 것도 알아

호텔커피숍에서 선 본 남자와 결혼을 결심할 때처럼
어쩌면 그때보다 더 큰 결심이 필요한 순간

뚜껑 없는 볼펜과 고속도로 통행증과 여성용 위생용품 다 써가는 콤팩트 오래된 립스틱과 너저분한 것들이 든 내 핸드백을 테이블 위에 쏟아보라는 말에도
아이가 유치원 때 만든 놀잇감과 그림들 유통기한이 지난 생수병 고장 난 우산 누구에겐가 보여주려고 출력해 들고 다니는 20년 전에 쓴 글뭉치 이제는 신지 못하는 뾰족구두 핸드백 속보다 더 너저분한 자동차 트렁크를 열어보라는 말에도
블라우스 단추를 열어보라거나 치마를 들추어보라는 말에도
거리낌과 망설임과 주저함은 이미 그 자리에 오기 전에 다 끝내고 마치 이런 시간이 올 줄 알았다는 듯이 당연하게 그래서 기다렸다는 듯이 행할, 그런 결심이 필요한 순간

다시 태어난 듯이
내가 살던 세계가 아닌 전혀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가듯이
몸만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정신도 내어주며
발개벗을 결심이 필요한 순간,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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