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해여자 May 05. 2024

섬집 아기: 엄마는 그 섬에서 무얼 했을까?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이야기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남아 집을 보다가
파도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지만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어
다 못 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ㅡㅡㅡㅡㅡ

'엄마'는 사랑을 찾아갔다.

갈매기 울음소리를 듣고는 정신이 번뜩 들어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ㅡㅡㅡㅡㅡ

한인현(1921~1968)의 시에 이흥렬이 1950년에 곡을 붙인 이 노래는 '섬집 아기'라는 제목의 동요이다. 자장가로 불린다.
1946년에 발간된 동시집 '민들레'에 수록되어 있다고 하니 적어도 25세 이전에 썼을 가능성이 높다.
이 동요에 대한 여러 설이 있는 바, 멋대로 해석 하나를 덧붙여본다.
괴담 또는 요설에 가까울 지도 모르겠다.

배경은 바닷가의 가정집이며, 등장하는 인물은 '엄마'와 '아기'이다.
'아빠'는 부재한다. 사별하였을 수도 있고 또는 일을 하러 갔을 수도 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아빠'의 부재로 인하여 '엄마'가 아이를 두고도 생산활동-굴 채취-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모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섬'이라는 공간 역시 생각해 볼 만한 문제다. 이들의 집이 섬에 있는지 또는 섬으로 오가는 배가 있는 해변에 있는지 모를 일이다. 만약, 섬이 아닌 육지 바닷가에 집이 있다면 엄마는 섬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타야 할 것이고 시에는 등장하지 않는 뱃사공의 존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섬은 독립적인 공간이다. 아마도 집성촌 또는 촌락을 이루어 생활할 가능성이 높은 시대적 배경을 생각한다면 '섬'이라는 공간은 타자들의 관심 또는 감시로부터 해방된 공간으로 볼 수 있다. 남편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아기의 엄마인 여성이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처신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물리적 공간이 아닌 심리적 공간으로서 동떨어진 곳, 외딴곳을 나타낸다고 볼 수도 있다.

보편적 모성을 생각해 볼 때, 아기를 혼자 두고 갈 만큼이라면 상당히 절실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것이 채취를 통한 식재료를 확보하기 위한 것인지 채취하여 장에 내다 팔기 위함인지 또는 갈급한 사랑을 채우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어쩔 수 없이', '더는 미룰 수 없어서' 차마 떨치고 갔을 것이다. 잠든 아이를 두고 간 것도 아니고 아직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아기를 두고 나갈 만큼.

아이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을 나타낸다. 자장가를 불러주어야 할 엄마의 자리를 '파도'가 대신하고 있다. 엄마의 부재를 '파도'가 채우는 것이다. '남편'의 부재를 채울 무엇도 필요하지 않을까?

아이가 깨어있을 때 굴을 따러 갔다는 것은 '엄마가 굴을 따고 올 터이니 너는 집에 있거라'라는 말이 통할 정도의 아기일 수 있고, 엄마에게 매달리지 않고 말귀를 알아듣고 집을 지킬 정도라면 통상적으로 서너 살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처음 있는 일이 아닌 종종 있어와서 아이에겐 익숙한 상황이라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서너 살이라면 혼자서 팔을 벨만큼의 신체 발달 정도가 된다. (최초의 표현이 '아기'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아이'인데 노래로 불리기에 보다 듣기 좋은 발음을 위해서 '아기'로 바꾸어 불렀을 수 있다. 당시의 '아기'는 몇 세 정도까지를 지칭하는지에 대한 확인도 추가적으로 필요하다.) 주목할 것은 아이는 엄마를 따라나서지 않고 혼자 잠이 듦으로써 문제상황을 받아들이고 혼자 해결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엄마의 반성은 2절에서 다루어진다.

'갈매기 울음소리'와 '맘이 설레어'도 주목할 부분이다. 엄마가 굴을 따고 있었는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갈매기 울음소리로 인하여 환기기 된다. 갈매기 울음소리가 마치 아기의 울음소리처럼 들렸을 것이다. 섬그늘에서 '그것'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문득 생각되었을 것이다.

'설레다'라는 표현은 사전적 의미를 참고할 때 '일렁이다'의 뜻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갈매기 울음소릴 듣고 마음이 일렁이는 것이다. 그제야 자식 생각이 난 것이다. 굴 바구니가 다 차지 못한 것은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그런 것이기도 하겠고  캐는 일에만 시간을 쓰지 않고 또 다른 어떤 활동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

모랫길을 달려올 수밖에 없는 것은 모성이자 자기반성, 참회, 후회 등등의 영역일 것이다. 달려오고 있는 모랫길은 이쪽과 저쪽을 연결해 주는 삼각지대와 같다. 모랫길 저 끝에 누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모른다. 남편이 어디 갔는지도 모르고, '엄마'가 아이를 두고 섬그늘로 가야 하는 어떤 상황이었는지도 모른다. 정말 굴을 따러 간 것인지도, 굴을 따다가 무엇을 했는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갈매기 울음소리'로 인해서 일어나는 환기 및 장면의 전환이다. 돌아와야 할 곳, 있어야 할 곳으로 이끈 것이 '모성'이라는 것에는 이견을 두지 않겠다.

다만, '엄마'는 많이 외로웠을 수도 있다. 아이를 두고 갈 만큼. 여자의 바람이 더 무서운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남편들은 부인을 사랑해서 사랑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자식에게서 '엄마'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도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어린이날을 앞두고 너무 잔인한 해석인지 모르겠지만.

장난처럼 썼던 앞 글의 문장을 이어서 생각해 보고 씀.

매거진의 이전글 섬집 아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