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선과 악의 경계가 무너진 한국을 보여주다
감독 : 연상호
출연 : 강동원, 이정현, 이레, 구교환 등
부산행 기차 안을 벗어난 좀비 이야기는 어떨까, 궁금증을 안은 채 영화관을 오랜만에 찾았다.
여름에는 역시 좀비 영화지 하면서.
* 이하 내용은 영화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부산행>에서는 악인과 선인이 분명하게 나뉜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이기적인 사람. 하지만 <반도>에서는 그 경계가 조금 흐려져 있다.
바이러스 초창기 히치하이킹 도움을 청하는 민정의 가족을 지나치지만, 영화 후반부 민정을 구하러 좀비를 뚫고 가는 정석. 노예 게임에 직접 참여해 살육을 하진 않지만 본인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충성스런 부하를 망설임 없이 죽일 수 있는 서대위. 포스트 좀비 바이러스 시대에 생존하기 위해 언제든 선과 악을 꺼낼 준비를 한 채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물론 정교하고 입체적인 캐릭터로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전형적인 캐릭터로 가득했던 전작에 비한다면 매우 반가운 일이다. 특히 서대위의 경우 끝없는 좀비와의 싸움과 탈출의 희망 없는 미래에 지쳐 관성적으로 살아가는 인물로, 배우 구교환의 정교한 연기로 잘 표현되었다.
경계가 흐려진 건 선과 악 뿐이 아니다. <반도>에선 남과 여의 전통적인 성 역할도 없다. 정석과 서대위, 김노인, 구철민 등 영화 속 남성들은 감정적으로 행동하며 때론 그 감정 때문에 긴박한 순간마다 객관적인 판단을 잃곤 한다. 희망이 사라진 좀비 시대에 김노인은 당장의 생존 전략보다는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제인’과 전화 통화가 유일한 하루의 일과다.
반면 민정, 준이, 유진은 정확한 판단력과 냉철함으로 계획을 바로 실천하는 추진력이 강한 여성 인물이다. 준이의 멋진 드라이빙 신과 유진의 고민 없는 사격 실력 등은 영화 속 속도감을 더해준다.
영화를 보며 올해를 집어삼킨 코로나 바이러스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이미 혐오로 넘쳐나는 세상에 코로나는 또 다른 혐오를 만들어낸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자에 대한 혐오, 방역 수칙을 무시하고 단체 활동을 가진 자들에 대한 혐오, 그리고 인종에 대한 혐오. 나 또한 모든 혐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지하철에서 마스크를 코끝에 걸친 채 크게 통화를 하는 사람을 보면 절로 화가 나며 그 자리를 피해야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반도>에서의 혐오는 생존자들에게 노예 각인을 찍고 좀비 경기장에 내치는 게임으로 나타난다. 좀비에 대한 혐오가 아닌 살아남은 다른 자들에 대한 혐오를 잔인한 게임으로 해소하는 군인들의 모습은 뉴스 속 마스크를 낀 동양인에 대한 무차별 폭행 장면, 확진자에 대한 무분별한 비난과 자꾸만 겹쳤다. 그들의 얼굴이, 그리고 혐오와 화가 점점 늘어나는 내 얼굴도 저들의 얼굴과 같은 건 아닐까.
전반적으로 <부산행>보다 빠른 속도감에 재미있게 보았지만 여전히 아쉬움은 있다.
<매드맥스>, <나는 전설이다> 등 여럿 좀비 영화에서 이미 본 것 같은 클리셰들, 급격히 속도감과 긴장감이 줄어든 마지막 구출 장면 등은 많은 관객에게 아쉬움을 준다. 흥미진진한 초반부에 비해 매번 다소 아쉬운 결말은 감독이 아직 풀어야 할 과제일 것이다. 다음 좀비 영화는 결말 5분 전까지 서스펜스 가득한 작품으로 돌아와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