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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디 Mar 07. 2021

슬픔은 또 오고야 말겠지만

나의 슬픔과 영화 <미나리>

나의 슬픔

저녁 시간, 여느 때처럼 우리 집 고양이를 안고, 만지고, 장난치다가 그 아이는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몇 마디 했다.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워, 네가 없는 나는 정말 불행했을 거야, 그러니 앞으로도 아프지 말고 같이 있어 줘. 이런 말들을 하고 나면 항상 뒤따라오는 생각이 있다. 언젠가 우리 고양이도 나를 떠나는 날이 온다는 것. 고양이뿐이 아니다. 더는 엄마가 내 옆에 없는 순간이 올 테고, 다양한 경로로 지금 내가 사랑하는 많은 이들의 부재를 경험하게 될 테다.


문득 따져봤다. 미래에 닥칠 대사건 중 행복한 일이라고는 몇 개나 될까. 먼저 지금껏 내게 벌어졌던 ‘행복의 대사건’을 가늠해봤다. 재수를 결심한 채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대학교 합격 소식을 들었던 일, 고양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인 일, 첫 회사에 합격했던 일, 두 번째 회사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일. 어떤 기준으로 분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단 지금 떠오르는 건 이 정도다. 앞으로 회사를 옮기더라도 처음 학생 티를 벗고 직장인이 되어 느꼈던 기쁨에 비할 바 못 될 것이다.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대사건이겠지만 지금으로선 확신이 없다. 출산의 기쁨 역시 아직은 내가 맞이할 사건이란 생각은 안 든다.


슬퍼졌다. 앞으로 나에게 대사건이란, 모조리 슬픈 일뿐인 걸까? 미리 대량의 슬픔을 준비해야 하는 걸까? 그동안 일찍 얻은 너무 많은 행복을 철없이 소진해버린 건 아닐까?


영화 <미나리>

어제 영화 <미나리>를 봤다.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 집권 시절, 미국에서 생계를 꾸려야 하는 한국인 이민 가족의 이야기였다. 제이콥과 모니카 부부, 그리고 그들의 아들딸인 데이빗과 앤, 거기에 모니카의 어머니까지. 모든 가족이 그러하듯 크고 작은 충돌이 생긴다. 하지만 그들은 와중에도 서로를 놓지 못한다. 영화의 제목이자 커다란 메타포 자체인 ‘미나리’처럼, 그들은 어떻게든 서로를 부여잡고 발 디딘 땅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려 한다. <미나리>를 보며 가장 크게 느꼈던 정서 역시 슬픔이었다. 인물 중 그 누구도 잘못한 사람은 없다. 사실 작품의 마지막 30분가량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큰 사건도 없다. 하지만 그들은 각자 불행하며 괴롭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최선을 다하며 살뿐인데 슬픔은 왜 꼭 약속이라도 해둔 듯 등장하고야 마는 걸까? 왜 노력할수록 나아진다는 보장은 없고, 그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던 곳으로 인생은 방향을 틀고야 마는 걸까.



굳이 슬픔을 향해 나아가려 노력하지 않아도, 마주하게 될 것이라면, 그 사실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할까? 노력이란 결국 정해진 결말로 치닫기 전 발버둥에 지나지 않는 건가?


그러나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나에게 다가올 큰 사건들은 슬픔 투성이 일지 모른다. 하지만 다가올 ‘일상’을 행복으로 채우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다. 사실 절대적 시간의 양으로 따진다면, 일상이 대사건을 이긴다. 슬픈 일은, 진부한 표현이지만, 피할 수 없는 소나기처럼 닥쳐오곤 한다. 그러나 적어도 일상은 내가 선택하고 취할 수 있다. 언제 어떤 모양으로 들이닥칠지 모를 슬픔을 미리 걱정하는 일은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100% 나의 의지로 일상을 가꾸자. 내 의지가 아닌 것이 나의 소중한 것을 앗아가는 광경을 가만히 보고 있지 말자.


<미나리>의 가족은 다시 일어선다. 그들의 노력이 어떤 화살이 되어 어느 방향으로 날아갈지 그들도 모른다. 하지만 있는 힘껏 일상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그들 역시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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