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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가을 2025

서장원, 이유리, 정기현

by 김알옹

계절마다 좋은 작품 세 편을 읽는 기쁨을 안겨주는 얇은 책, <소설 보다> 시리즈. 모든 작품이 대박을 치는 경우도 있고 둘만, 혹은 하나만 재미있는 경우도 있지만 셋 다 망하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각 작품 말미엔 평론가와 작가의 인터뷰가 항상 수록되어 있어서 독자의 이해도를 높여준다.





서장원 <히데오>

일본에서 태어난 '히데오'는 집단 따돌림을 당하다가 한국으로 넘어와 예술학교를 다니며 연기에 재능을 발견한다. 작품의 화자는 그의 학교 선배로, 그를 좋아하지만 히데오는 그렇지 않다. 처음에는 화자에게만 알려주는 비밀이었던 히데오의 일본 시절 이야기는 점점 그가 인기를 누리면서 자신의 서사를 구성하는 에피소드로 활용된다. 아주 미세한 인물의 태도 변화나 감정 변화를 직접적으로, 혹은 작은 장치에 간접적으로 소설에 심어놓고 독자가 이를 발견하길 원하는 듯한 작품 구성이 썩 끌리지 않는다. 항상 함께 수록되는 인터뷰에서 평론가가 이런 장치들을 발견하고 질문하더라. 아 피곤하다. "오빠 나 뭐 변한 거 없어?"라는 밈 생각이 난다.


'젊은작가상'이 좋아하는 이 작가님은 아주 강하게 퀴어 쪽으로 인물을 구축해 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번엔 LGBTQ 중 아무도 해당되지 않는 인물이 등장해서 오히려 놀랐다. (준비 중인 장편소설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죽은 젠더퀴어 소년의 죽음을 쫓는 어머니 이야기라고 한다.) 대체 작가님의 성별이 뭔지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찾아봤더니 여성이었다. 퀴어들 사이에선 남-여의 이분법이 아닌 다양한 성별 구분이 있던데(그것이 바로 젠더퀴어라고 한다) 작가님은 내 느낌에 성별만 여성이고 젠더는 뭔가 복잡할 것 같기도 하다. 철학을 공부하다 그만두고 23세에 서울예대 문창과에 재입학한 후 졸업하고는 한예종 서사창작전공 전문사를 전공했다고 한다. 글 쓰는 재능이 있는 사람인가 보다.



이유리 <두정랜드>

'두정'이라는 가상의 지방 도시를 배경으로 '두정랜드'라는 놀이동산에서 알바를 하는 젊은 처자가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함께 일하는 연두라는 동료에게 자신이 서울 대학생인데 휴학하고 학비를 벌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매주 서울에 가서 홍대와 연남동을 돌아다니며 서울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을 채운다. 그리고 다시 두정랜드로 돌아와서 연두를 비롯한 두정의 모든 것들을 멸시하고 서울만을 동경한다. 그러나 자신의 가면이 벗겨지게 되면서 주인공은 삶의 방향을 잃는다. 현재의 우리나라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차별 문제를 다뤄보려고 애쓴 작품이다. 시종일관 서울에 대한 열등감과 동경으로 똘똘 뭉친 평면적인 속물 캐릭터는 오랜만에 만난다. 신선한걸?


70미터에서 떨어지는 롤러코스터를 안내하는 주인공이 수없이 읊어대는 멘트다.

짜릿한 모험의 세계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사악한 괴물 크리갈이 쳐들어와 공주를 납치하려는 절체절명의 순간 여러분은 크리갈을 무찌르고 공주를 구할 수 있을까요 크리갈의 침공 지금 출발합니다

어디서 들어본 내용이라고 생각했는데 경주월드에 다녀와서 소재를 얻었다고 작가 인터뷰에 언급되어 있다. 경주월드! 롯데월드는 코웃음이 나고, 에버랜드는 늙었고, 이제 대세는 경주월드다. 작년 가을에 아이와 둘이 경주월드에 가서 무시무시한 어트랙션들에게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경험을 해보고 나서, 나의 노화를 다시금 느꼈던 기억이 난다. 어릴 땐 T익스프레스를 몇 번씩 타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경주월드 드라켄과 크라크를 타고서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50미터 높이에서 거꾸로 매달려 3초 정도 멈춰서 땅과 나 사이엔 안전바 하나만이 추락을 막아주는 크라크 위에서 난 내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여기 매달려 있는지 잠시 고민했다. 작품 중에 '롤러코스터는 안전한 임사체험'이라는 표현에 무릎을 탁 쳤다. 그렇다. 롤러코스터가 아니라면 우리가 언제 그런 높이에서 추락하는 체험을 해보겠는가.


으악 왜 공중에서 멈춰! 경찰 불러!

정기현 <공부를 하자 그리고 시험을 보자>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는 중학교 3학년 여학생. 하루에 13시간을 공부하고 딱 2시간만 스트레스를 푼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남자친구가 있는데, 둘은 섹스도 하고 영화도 본다. 그러다 재미있는 놀이랍시고 사람들이 다치지 않을 만한 - 먹다 남은 죽을 작은 비닐봉지에 엄지손가락만큼 넣어서 7층 높이의 아파트에서 던져 행인들을 맞춘다. 그러다 학교 일진들을 맞추고, 공부를 잘하는 주인공은 엉겁결에 일진의 무리에 합류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전교 1등은 놓치지 않는다.


전작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을 읽고 '뭐 이런 나사 빠진 작가가 있지...'라는 생각을 했다. 어딘가 엉성한 구성과 엉성한 인물과 엉성한 서사. 작가 인터뷰를 보니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던 이것과 저것을 나만의 논리대로 이어 보기'라는 방법이 삶을 조금이나마 재미있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한다. 그 '나만의 논리'가 이해가 안 되니까 저런 생각이 드나 보다.


내 아이가 얼마 안 있으면 저 나이대가 돼서 그런가? 요즘 중학교 3학년이 섹스하는 건 이제 독일이나 네덜란드처럼 당연히 벌어지는 일인가? 하교 후 남자친구의 집에서 매일 섹스를 하는데 부모란 인간은 왜 모르나? 그런데 쟤네들 피임은 제대로 하고 있나? 7층에서 창밖으로 뭘 던지는 걸 정말 놀이라고 생각하고 작품에 넣은 건가? 주인공 여자애가 공부도 못하고 그냥 평범한 아이었어도 과연 이런 전개가 가능했을까? 공부만 잘하면 무슨 짓을 해도 다 괜찮은 거야? 일진이랑 어울려서 놀았으니 외고 시험 망치는 걸로 균형이 맞춰진다는 설정이야? 일진 미화. 베란다 물건 투척 미화. 만 15세끼리의 성관계 미화. 이거 지금 내가 다 이해하면서 소설을 읽어야 하는 건가? 이런 걱정하는 내가 꼰대인 건가? 작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소설을 썼고, 이 소설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질문을 던지는 평론가와 떡하니 책에 수록한 출판사는 이게 괜찮다고 생각한 걸까? 다 정상인데 나만 예민하게 구는 건가?




셋 중 <두정랜드>가 좋았다.


세 작품의 인터뷰를 진행한 평론가 중 한 명은 내 대학교 2년 후배다. 내가 3월에 입대하느라 신입생 OT를 따라가서 술을 엄청 먹였는데, 하도 많이 먹여서 토하길래 잘 챙겨줬던 모습만 기억하는 후배. 전공은 다른 쪽인데 평론가로 등단해서 교수까지 하다니 대단하다. (소설가를 직접 만나서 대화해 보는 점이 가장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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