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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

김애란

by 김알옹

최근에 동네 도서관에서 작가님의 <이중 하나는 거짓말> 북토크가 열려서 다녀왔다. <안녕이라 그랬어>도 출간된 지 얼마 안 된 터라 풍성한 이야기들을 1시간 30분 동안 들을 수 있었다. 소설의 뒷이야기와 작가님의 해석, 좋은 질문과 답변이 이어지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작가님은 정말... 눌변인 듯 달변이고, 심각한 듯 유머러스하며, 단어 하나 말 한마디를 고심해서 꺼낸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애란 작가님은 앙다문 입술처럼 맺고 끊음이 확실한 문장을 말씀하신다.




예전에도 좋아했지만 더 좋아지게 된 작가님의 작품 중 안 읽은 게 뭐가 있는지 찾아보고는 <비행운>을 읽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서 도서관의 손때 묻은 책을 빌려왔다. 13년 전에 발간된 책이라 꼬질꼬질해져서 그런지 대단한 고전을 읽는 기분도 들었지만 13년 전 난 이미 30대 기혼남... 나야말로 늙었다. 마치 우리가 양귀자, 박완서 선생님의 과거 작품들을 읽을 때 어떤 작품들은 '진짜 다른 시대구나'라는 인상을 받는 것처럼(아들을 낳지 못해 자책하는 여성의 모습과 같은), 흘러간 옛이야기 느낌이 드는 작품들이 있었다.


동남아 여행에서 갈등하는 두 친구(<호텔 니약 따, 2011>), 단지 네일 하나 받은 걸로 엄청난 자기 관리를 한 것처럼 느끼는 젊은 처자(<큐티클, 2008>)와 같은 이야기들은 고작 15년 전 소설인데도 등장하는 소품들이나 사회상이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벌써 촌스럽게 느껴지는 15년 전 인물이라니... 다양한 문학상 작품집이나 최신 소설들을 찾아 읽다 보니 '지금'을 보는 내 감각이 발달했는지도. 나머지 작품들은 2025년에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세련된 주제의식을 보여준다. 2000년대 후반-2010년대 초반의 사회상이 어땠는지 나중에 누가 물으면 이 책을 추천해 주겠다.




당시엔 이명박의 뉴타운 정책 때문에 재개발되는 곳이 많았다. 조세희 선생님이 그려낸 재개발의 모습이나 김애란 작가님이 그려낸 재개발의 모습 모두 삶의 터전을 잃었거나 잃을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겪는 비극적 상황을 잘 그려냈다. <물속 골리앗>이란 작품은 읽다 보면 창밖에서 끝없이 내리는 빗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자연재해 앞에서 이웃이나 공권력으로부터 버려진 주인공이 어디까지 몰리는 상황에 이르는지 잘 보여준다. 끝없이 내리는 비의 묘사는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벌레들>은 '장미빌라'라는 재개발구역 앞 홀로 남은 낡은 빌라에 사는 임신부가 마치 재개발 구역의 낡은 집들이 무너지는 것처럼 자신의 생활이 무너지는 상황을 그려냈다. 날이 갈수록 점점 커지는 소음과 벌레의 크기가 삶을 침잠해 가는 과정을 정말 잘 묘사했다.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는 사랑을 잃는 슬픈 이야기다. 항상 사고만 쳐서 집안의 골칫거리인 용대는 흘러 흘러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택시기사로 일하고 있다. 모두가 그를 홀대하지만 조선족인 명화는 그를 보듬아준다. 둘은 조촐하게 살림을 차려 행복을 맛보려 하는데, 명화는 그만 불치병에 걸린다. 인생의 바닥에서 겨우 찾은 희망이 사라져 버린 용대는 명화가 남긴 중국어 녹음테이프를 따라 하며 덤덤히 택시를 운전한다. 영화 <파이란>과 소설 <운수 좋은 날>을 섞어놓은 느낌이랄까. 가끔 타는 택시에서 담배 쩐내가 나고 거친 운전과 뜬금없는 정치 얘기에 시달릴 때 기사님에게도 용대와 같은 사연이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상상할지도 모르겠다.


<하루의 축>은 50대 중반 여성인 인천공항 비정규직 청소노동자가 가난과 탈모에 시달리고 공항 이용자들이나 관리자들에게 무시받으면서도 하나뿐인 아들에게 애정을 쏟지만, 그 애정이 배신당하면서 멘털이 무너지는 이야기다. <서른>은 주인공이 노량진에서 함께 공부하던 공시생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을 띠고 있다. 재수 후 불문과에 입학했으나 취업이 안 돼서 학원강사를 하다가 다단계회사에 들어간다. 겨우 예전 학원 제자를 '소개'해서 다단계에 밀어 넣고 탈출하게 됐지만 그 제자에게 나쁜 일이 일어난다. 두 작품 모두 작가님이 인물을 그리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공항 청소노동자의 생활과 노량진/다단계회사의 현실을 조사했을지 알 수 있다.




작가님은 그때도 사회학자고 지금도 사회학자다. <안녕이라 그랬어>와 <비행운>을 비교해서 읽어보면 십여 년 간 세상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알 수 있다. 놀라운 점은 <안녕이라 그랬어>에서 작가님 또한 변화, 아니 진화해서 요즘 젊은 작가들의 세련된 감각에 전혀 뒤처지지 않고 오히려 더 날카롭게 가다듬어져 있다는 것이다. 2035년에 <안녕이라 그랬어>를 읽으면서 또 이와 비슷한 감상을 쓸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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