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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알옹 Nov 08. 2024

영원한 천국

정유정

난 정유정 작가님의 팬이다. <7년의 밤>, <28>, <종의 기원>, <진이, 지니>,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 <내 심장을 쏴라>, <완전한 행복> 모두 다 읽었다. 혹자는 '악의 3부작'이라고 부르는 <7년의 밤>, <28>, <종의 기원> 이 세 작품에서 완전히 반해버렸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나 <내 심장을 쏴라>나 <진이, 지니>는 딱히 좋진 않았지만 악의 3부작에 대한 팬심 때문에 읽기는 했다.


아직도 <종의 기원>을 읽던 어느 밤의 공기를 떠올릴 수 있다.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도저히 멈출 수가 없어서 옆에 애가 자고 있는데 휴대폰 플래시를 켜서 가슴에 올려놓고 누워서 책을 들고 불빛에 비춘 채로 끝까지 읽으며 전율했던 기억. 세상 평화롭게 아이는 옆에서 자고 있는데 아빠는 선혈이 낭자한 사이코패스 이야기를 읽고 있는 부조화.


<완전한 행복>이 출간되고 바로 읽었는데, 집에서 책을 읽고는 구역질이 느껴질 정도로 불쾌해졌고, 마음을 난자당한 기분이 들었다. 도끼 ㅣ로 고리대금업자 할머니의 두개골을 쪼개고는 수백 페이지에 걸쳐 어쩌지 괜찮아 젠장 아냐 수없이 고민하는 자의 내면을 의연히 읽어내리던 중학생 시절부터 거의 20년 넘게 책을 읽어왔지만 이렇게 실제로 독자의 마음을 연쇄살인자의 피해자처럼 갈기갈기 찢어놓는 능력은 아마 정유정 작가님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그때 경험이 너무 불쾌해서 팬심을 접고 앞으로 나올 책을 안 읽을 거라고 잠깐 다짐도 했었다.)


그렇게 3년 만에 나온 <영원한 천국>. 나오자마자 책을 읽고 싶어서 부들부들 떨렸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그만큼 <완전한 행복>의 타격은 컸다. 한참을 고민하다 '그래... 아무리 힘든 내용이어도 <완전한 행복>만 하겠어? 이 재미를 어떻게 외면하겠어...' 하고는 책을 손에 넣고 읽기 시작했다.


작가님, 왜 사이코패스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시다가 갑자기 메타버스 세계로 넘어가신 겁니까... 게다가 로맨스라니요. 살의에 가득 차 피와 살이 난무하는 이야기는 어디로 갔나요. 김초엽이나 천선란 소설을 읽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로맨스도 잘 쓰신다. 아래 대목을 보시라. 누가 이 단락을 정유정 작가님이 썼다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P.456) 그녀가 내민 잔에 커피를 채워주고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그녀의 눈에 걸려들었다. 아니 그 순간에 갇혔다. 그녀가 일순 낯설어지는 사술에 빠졌다. 비스듬하게 비쳐든 아침 햇빛이 그녀의 속눈썹에 가닥가닥 걸려 있었다. 검고 깊은 눈동자 안에서는 햇살이 은빛으로 산란했다. 두 뺨이 개울가에 내려앉은 첫눈 같았다. 귓불 아래로 돋아난 솜털들이 포실포실 고개를 든 눈꽃 같았다. 나는 손을 뻗어 쓸어보고 싶은 돌연한 충동을 느꼈다. 그녀의 코끝이 장미 봉오리처럼 빨개지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리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재채기를 터트리기 전에 나는 시선을 비켰다. 베란다로 날아든 까마귀 한 쌍의 움직임에 눈을 붙박았다. 실제로 보고 있는 것은 조금 전 나를 가둔 '그 순간'이었다. 귓속에서 맥박이 쿵쿵거렸다. 모세혈관들이 일제히 팽창하는 것처럼 온몸이 따끔따끔했다. 뱃가죽이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그녀가 여자로서 내 안에 들어온 첫 순간이었다. 지금도 그녀는 내게, 코가 빨개진 채 아침 햇살 속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기억돼 있다.


(P.470)

그녀의 시선은 내 손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내 눈으로 올라왔다. 나는 잠자코 기다렸다. 그녀가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려 내 손 위에 내려놓을 때까지. 조심조심, 손가락을 오므려 그녀의 손을 쥐어봤다. 새알처럼 작고 부드럽고 따뜻한 손의 느낌이 살을 뚫고 들어와 나를 휘감았다. 내 삶의 전부가 이 뭉클한 감촉으로 수렴되는 기분이었다. 저절로 입이 열렸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군가를 사랑하기 마련인데, 나는 그걸 몰랐어.” 나는 용기를 짜내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지금껏 누군가를 이만큼 사랑해 본 경험이 없어서.”


한순간 그녀의 시선이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코끝이 빨개지는 걸 볼 수 있었다. 귀와 뺨과 이마까지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나는 벌을 받는 심정으로 지켜봤다.


“경험도 없다면서…” 마침내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뽀롱뽀롱, 새소리가 새어 나왔다.

“꿀 바른 말을 너무 잘해. 사기꾼 같이.”


명치를 틀어막고 있던 답답한 덩어리가 뱃속으로 꺼지듯 내려갔다. 떨리는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머릿속에선 잡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온몸의 신경이 그녀를 향해 뻗쳤다. 내 몸의 온도는 삽시에 통제 불능 지점으로 올라갔다. 나는 손을 뻗어 그토록 만져보고 싶었던 그녀의 첫눈 같은 뺨을 감쌌다. 보송보송 일어선 눈꽃들을 엄지로 쓸어봤다. 상상하던 것과 똑같은 감촉이었다. 조금만 힘주어 만지면 녹아 사라질 듯한 신기루 같은 감촉.


나는 실내등을 꺼버렸다. 더 망설이지 않고 그녀의 입술을 찾아갔다. 그녀가 무어라 속삭였던 것도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로등 불빛을 받아 또랑또랑하게 빛나던 그녀의 눈동자만 기억난다. 아마도 내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눈 감아.”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오롯이 '내가 경험하지 못할 만한 또 다른 현실세계의 이야기 체험'과 '현대 사회의 문제점 파악'이기 때문에 SF는 손이 잘 안 가게 된다. 미래 세계는 예측은 할 수 있지만 아무도 알 수 없으며 소설은 허구를 바탕으로 하니까, 책을 읽으며 '모름'이 두 배가 되는 혼란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래서 <영원한 천국>은 많이 혼란스러웠다. 물론 한 번에 읽히는 재미는 있다. 폭력과 살인과 죽음도 많이 등장하긴 한다.


작가님은 이번 소설의 시발점으로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를 꼽았다. 책 후반부에 인간의 의식을 데이터화하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다. 누군가는 책을 읽고 500페이지가 넘는 새로운 시도로 자신의 새 소설을 3년 동안 써 내려가고, 누군가는 책을 읽고 방구석에서 이렇게 쓸모없는 독후감이나 쓰면서 다음 작품은 다시 작가와 독자 모두가 피폐해지는 하드보일드로 넘어가면 좋겠다는 쓸모없는 소망이나 하고 있고. ㅎㅎ


세계일보와 인터뷰한 내용을 잠깐 읽었는데, 작가님 피셜: 이제 4:4다.


―이번 작품은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신과 타인을 파괴하는 인간의 파괴적 욕망을 그린 작품이 『7년의 밤』, 『28』, 『종의 기원』, 『완전한 행복』 네 작품이고, 자유 의지를 바탕으로 한 인간의 성취를 그린 작품이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내 심장을 쏴라』, 『진이, 지니』에 이어 이번 『영원한 천국』까지 네 작품이다. 파괴적 욕망을 쓰는 ‘무서운 언니’와, 인간의 자유의지를 그린 ‘다정한 그녀’가 4대 4가 된 것이다(웃음). 파괴적 욕망을 그린 소설들은 인간의 어두운 면을 밑바닥까지 들여다봐야 해서 제 자신도 고통스럽고 피폐해진다. 『완전한 행복』을 쓰고 난 뒤 좀 피폐해졌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고 인간에 대한 혐오감도 생기기도 했다. 이번에는 성취적 욕망을 가진 밝은 소설로 써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다. 이야기 자체는 스릴러도 있고, 제 색깔을 벗어날 수 없지만, 그럼에서 제 소설 가운데 상대적으로 희망적인 얘기라고 할 수 있다. 다정한 그녀 계열에 속하는 소설이다. 제 소설 중에서 가장 큰 사이즈가 큰 소설이기도 하다. 『종의 기원』이 제가 갈 수 있는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면, 이번 작품은 가장 멀리까지 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 소설을 읽고 20~30대 독자들이 연애 좀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다. 사랑할 수 있는 청춘은 짧으니까.”


연애 좀 하시라 젊은이들.


덧:

작중 앵무새 ‘공달’은 작가님의 고양이 이름이다.

작중 팀장 ‘한기준’은 정유정 세계관에서 <28>, <진이, 지니>에 이어 세 번째로 캐릭터를 유지한 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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