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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아 Feb 03. 2024

찬란한 인생을 만들 수 있다면

<리빙: 어떤 인생>과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전해주는 빛

나이가 들수록 삶의 의미에 대한 고민이 한 번씩 찾아온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펄롱도 마찬가지. 현재 펄롱은 다섯 딸들을 키우는 성실한 가장으로, 그가 남들과 다른 게 있다면 어머니가 미혼모였다는 것. 그의 어머니는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지만 일하던 집주인 미시즈 윌슨은 모자를 거두고 펄롱에게도 자상했다.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다산책방. @ <리빙: 어떤 인생> 올리비에 헤르마누스 감독

펄롱이 하던 저 고민은 <리빙: 어떤 인생> 속 주인공 윌리엄스에게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에 찾아왔다. 기차를 타고 시청에 출근해 끝없는 민원을 처리하는 그에게는 매일이 같은 나날이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그는 같이 사는 아들 내외에게 몇 번이고 얘길 하려 하지만 그러질 못한다. 출근해 얼굴을 마주하는 동료들에게도 물론이다. 원작이 일본 영화(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이키누>, 이번 영화 각본은 가즈오 이시구로가 했다.)라 그런지 인물들 사이에 대화는 하지만 소통하지 못하는 일이 지속된다. 윌리엄스는 그동안 하지 않던 일들을 하겠다 마음먹고 출근을 하지 않는다.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소통의 중요성에 대한 것인가 하며 보았는데, 후반부터는 소설 하나를 떠올리면서 감상할 수밖에 없었다.

동료들 중 유일한 여성이자 임시직이었던 마거릿은 직장을 옮기는데, 근무 시간에 시청 근처를 서성이는 윌리엄스를 발견한다. 그렇게 만난 둘은 함께 걷고 식사하고 나란히 앉아 얘기하는 시간을 종종 갖는다. 윌리엄스에게 그 대화는 어떤 깨달음을 주었던 걸까. 타인에 대해 의식하게 되는 계기일 수도 있고, 겉으로만 대화하는 게 아닌 속을 꺼내 보일 수 있는 관계 맺음(죽은 아내를 제외하고 거의 유일한)일 수도 있겠다. 마거릿 덕분에 다시 출근하게 된 주인공은 곧 생을 마감한다. 관객으로서는 ‘이렇게 끝이라고?’ 하고 의아했는데, 영화는 계속되고 죽기 전에 그가 어떤 일을 수행했는지는 다른 사람의 증언을 통해 보여준다. 아, 그의 인생이란. 한 사람의 인생이 그토록 찬란할 수 있는지. 그에게 새로운 빛을 본 이들이 저마다 말하는 그 부분은,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 속 펄롱을 떠올리게 했다.


소설 속 펄롱과 영화 속 윌리엄스는 안정적으로 살고 있었다. 윌리엄스에게는 곧 다가올 죽음이, 펄롱에게는 자신의 출생과 과거가 남다른 삶을 살게 했을 터. 그 남다름이라고 하는 것은, 타인을 돕는 일.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기꺼이 수고를 들여 누군가를 더 낫게 살도록 하는 일이었다. 소설에 두어 번 나오듯이 ‘우리가 가진 것 잘 지키고 사람들하고 척지지 않고 부지런히 살면’ 그런대로 살 수 있는 게 인생이겠지만 그렇게만 사는 것이 과연 괜찮은가? 소설의 끝부분에 이르면 이런 문장들을 만난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략)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펄롱은 매일 해야 할 일들이 차례로 혹은 멋대로 닥치는 가운데,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여유는 생활의 고단함과 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인 여유와 관계 없이 잠시 멈춰 서서 좀 더 나은 상황을 꿈꾸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지 않을까. 소설 초반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가끔 펄롱은 딸들이 사소하지만 필요한 일을 하는 걸 보며-예배당에서 무릎 절을 하거나 상점에서 거스름을 받으며 고맙다고 말하는 걸 보면서-이 애들이 자기 자식이라는 사실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한 기쁨을 느끼곤 했다.”

두 주인공이 보여준 행동은 한 사람을 구원하는 일처럼 대단한 것이지만, 작가는 ‘사소하지만 필요한 일‘에 대해 다루며 독자의 마음을 열게 했다. 거창하고 대단한 무엇이 아닌, 그저 감사를 표하는 일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인생에서 마주하는 작은 순간들을 사소하지만 필요한 일을 통해 타인을 웃게 하는 순간들로 채워간다면 어떨까.


언젠가 펄롱이 길을 잘못 들었을 때 마주친 노인에게 이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묻자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내 인생은 나의 선택으로 만들어진다. 그 선택의 방향을 다시금 설정해 본다. 사소하더라도 필요한 일로, 기쁨을 전하며 나 또한 행복할 수 있는 일로 말이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영화 속 윌리엄스와 소설 속 펄롱의 용기 있는 이야기를 널리 퍼뜨리는 일. 궁금하게 하는 일, 저런 사람들의 자리를 넓히고 싶다. 이 글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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