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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아 Dec 19. 2024

해피엔딩을 쓰는 담임 마음

작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다가 요새 내가 하던 일이 '작업'으로서의 소설가 꼴을 하고 있지 않나 싶었다. 담임들은 매학년말 관찰한 행동 특성을 토대로 학생의 일 년 간의 행동발달사항을 기록한다. 인성, 예의 등의 생활 태도, 정서적 측면, 학업에의 참여, 자기주도적 학습 및 성취, 진로 의식이나 미래를 위한 노력 등 다각도에서 학생 성장을 진술하는 것이다. 스물여덟 명의 일 년을 기록하면서 내가 지금 소설을 쓰고 있는 건가 싶은 순간이 있었다. 학교생활기록부 기재요령에 따르면 단점을 입력할 경우에는 변화 가능성을 함께 쓰도록 되어 있다. 내 작업 동료는 챗 GPT로 고만고만한 내 어휘를 다채롭고 긍정적으로 가꿔준다. 생활이 엉망이었을지라도 앞으로의 성취가 기대된다는 행복한 결말로 쓰다 보니 누구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아이들이다. 작성한 글은 분명히 A 학생을 떠올리고 쓴 글인데, 순서를 바꿔 글을 먼저 읽고 우리 반 누구게? 하고 묻는다면, 학생 A를 떠올릴 수 있을까?


병렬독서가로서 요즈음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또한 내가 손대는 책이다. 이 소설은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세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명상록'을 쓴 그분이다.)에게 남기는 서신 형식이다. 자기 일생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 황제는 인간의 생존을 평가하는 수단을 세 가지라고 밝힌다. 자신에 대한 연구, 사람들에 대한 관찰, 독서. 관찰 부분에 대해 읽고 또 읽다가(나는 이 책을 이렇게 반복해 읽을 수밖에 없다.)

"사람들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은 더더욱 불완전한 방법으로서. 대부분의 경우 인간의 악의가 만족을 얻는 아주 저열한 검증만으로 끝난다. 신분, 입장, 그리고 우리들의 온갖 우연적인 상황들이 인간 감정가의 시야를 제한한다. (중략) 우리들이 타인에 관해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은 간접적인 것이다."

하는 문장들을 여러 번 읽으면서 과연 그렇다고 수긍했다. 내가 일 년 간 관찰했다고 하는 우리 반 아이들을 나는 내 관점으로만 보고 들었다. 하루 중 많아야 두 시간쯤, 같은 공간에 있었을 뿐이고, 상담을 비롯해 잦은 대화를 나누어 왔지만 그 내면까지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으리라. 아직도 알지 못하는 부분, 더 훌륭할 품행을 발견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일 년이 지나간다고 아이의 발달에 대해 써야 하는 운명이라니. 그저 내가 저열한 검증만 한 것은 아니길 바랄 뿐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걱정을 상쇄시켜 주는 글이 뒷부분 나왔다.

"나의 삶을 관찰해 볼 때, 나는 그것이 무정형하다고 생각됨에 놀란다.(중략) 내가 아니었던 것이 아마도, 나의 삶을 가장 정확히 규정하는 것일 것이다."

황제는 본인이 어떤 사람이 아닌지에 대해 이렇게 서술한다.

"나는 자기의 행동이 자기 자신을 닮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의 하나가 아니다. 나의 행동은 정녕 나를 닮아야 한다. 왜냐하면 나의 행동은 나를 재는 유일한 척도요, 사람들의 기억 속에,  혹은 심지어 나 자신의 기억 속에도 나를 묘사해 넣은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며, 죽음의 상태와 삶의 상태 사이의 차이를 이루는 것이 아마도 바로, 행동으로써 자신을 표현하고 변화시키기를 계속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이기 때문이다."

나의 관찰이 터무니없이 아이를 평가하는 것은 아닐 거라는 근거가 되어주었다. 보이는 행동이 다는 아닐지라도 그 아이의 특성은 맞을 테니까. 긍정적으로 미화하고 기대되는 바를 써준 내 기록이 완전 허구는 아니며, 아이 안에 있는 마음과 의지를 들여다보고 말과 행동을 기억해 서술한 것이니까.


오늘 아침 우리 반 아이들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이 귀여워졌는데! “ 했다. 속으로 흠칫 놀랐다. 얘랑은 신경전 하다가 큰 충돌을 겪을 수도 있겠다 싶었던 아이였기 때문이다. 아이는 내 얘길 듣고 조용히 웃었다. 이제 알았냐는 듯. 호르몬 폭주로 사춘기가 진행 중인 남학생도, 내 속을 긁어대던 남학생도, 여전히 장난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남학생도(아들들이란) 그 아이들의 순한 얼굴을 이제 나는 안다.

최근 학교에서 아이들과 산뜻하게 행복했던 순간이 있다. 우리 반 말썽쟁이들이 청소하고 집에 가는 뒷모습을 볼 때였다. 지각으로 남아서 청소를 하던 남학생들과의 시간. 그럴 때 내 요구 사항은 무척 다양한데 -여기 쓸자, 어머 여기에도 쓰레기가 있네, 문틈도 할까, 사물함 위 먼지가 많네 등- 아이들은 그 연이은 지시를 투덜대지 않고 다 해냈다. 순둥이 표정을 하며 봉사를 하는 이유는 그동안 숱하게 많은 실수와 장난으로 나를 실망시키고 반복해서 지도받고 상담한 탓이다. 아이들이 내게 못난 꼴, 부족한 면을 여러 번 보여준 것처럼 나 또한 아이들에게 큰 소리로 으름장 놓고 명심보감 쓰라고 괴롭히고 외워오라고 긴 시를 선물하곤 했으니 우리 사이에는 격렬한 감정들이 오갔던 셈이다. 그리고 이제는 아이들도 내가 지들을 이뻐하는 걸 안다. (나한테 잘보이려고 하는 것도 안다.) 어쨌든 그렇게 청소를 마치고 전등을 끄고 문을 잠그고 “수고했어, 잘 가, 내일 또 와.”하고 보내는데, 가방 메고 신발 들고 인사하고 가는 그 소년들의 뒷모습이 너무도 귀여워서 흐뭇했다. 속에 응어리진 감정도 없고 우리 서로 할 도리 다했다 싶은 산뜻하고 후련한 마음. 뭐 애들이 집에 가는 뒷모습을 보고 행복했던 건, 애들이 다 가서. 그게 내 행복의 이유, 맞다. 그저 아이들이 무탈하고 무사하게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 거기에서 뿌듯하고도 티 없는 기쁨을 느꼈다.

우리가 이렇게 친해지고 익숙해졌는데 말이다. 일 년 내내 수고해서 이제야 나와 부드러운 관계로 다듬어진 아이들과 헤어질 생각을 하니 좋으면서도 아까웠다.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해마다 새롭게 느낀다. 그래, 이 애정 담은 시선으로 내가 우리 반 아이들을 기록해야지, 아무렴,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이들이 그동안 보여주고 들려준 기억을 꺼내어 다시 펼치면서 아이들이 성장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발전하기를 기대해 본다. 아니, 소설 말고 좀 더 주술적인 힘을 갖는 주문 정도면 좋겠다. 내가 쓰는 긍정적인 기대가 실현되기를. 어쩌지,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란에 변화 가능성을  한 문장 더 추가할까.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현대문학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1>,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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