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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희 May 11. 2022

너를 보내야 하다니

‘조침문(弔針文)’이라는 조선시대 수필이 있다. ‘유세차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미망인 두어 자 글로써 침자(針子)에게 고하노니…’. 이렇게 시작하는 유 씨 부인이라는 어느 미망인의 글이다. 그녀는 명문(名門)에서 태어나 문한가(文翰家)에 출가를 하였지만 아이도 없이 남편과 일찍 사별을 한 탓에 오직 바느질에만 재미를 붙이고 살아야 했다. 그러던 차에 중국에서 가져온 바늘을 시삼촌에게 선물 받고는 남편 삼아 자식 삼아 애지중지 귀하게 여기며 아껴 왔다. 그런데 그만 부러뜨리고 말았다. 수필은 ‘오호 애재라, 오호 통재라’로 이어지며 바늘과의 각별한 결별(訣別)에 애끓어하고 있다.  

 며칠 전 사고로 졸지에 우리 집 차를 폐차해야 할 일이 생겼다. 간절하게 ‘조침문’이 떠오른 것은 그 때문이다. 구입한 지 10년이 지났으니 요즘처럼 실용성과 새로운 것만 앞세우는 세태로 보면 외장이 낡아 있어 이미 버렸어야 할 물건이기는 하다. 그런데도 간혹 차를 접해본 이들 중에 그냥 해본 소리라고는 하지만 ‘버릴 것이면 내 것과 바꾸자’고 한 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은 꽤 쓸만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유 씨 부인이 되어 ‘오호 애재라, 통재라’를 통감하고 있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폐차(廢車)를 시킬 만큼 큰 사고였음에도 인명사고가 크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며 사람들은 위로를 해주고 있다. 그렇긴 하더라도 망가진 차를 보는 순간 찡하니 눈물이 도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볼 수 없을 만큼 엉망진창이 되어 갈기갈기 찢긴 모습에 마음 또한 그리 되어 착잡하기 이를 데 없다. 내가 늘 앉았던 자리며 아이들이 편히 잠들기도 했던 뒷자리는 이미 평화롭던 예전 모습이 아니다. 즐겨 듣던 음악 테이프이며 물병과 소지품들이 여기저기 나뒹굴었고 우그러져 있는 핸들과 뒷좌석까지 허옇게 뿌려져 있는 유리 파편들은 나를 경악(驚愕)하게 했다.

 마치 안타까운 핏줄이라도 보는 냥 안절부절 어찌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가까이 가지 말라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문을 열고 하나하나 손으로 쓸어내리며 마지막 가는 녀석을 배웅했다. 비용이 얼마가 들어도 소생시킬 수 있으면 제발이지 그러고 싶었으니 이런 마음을 누가 이해를 할까. 생자필멸(生者必滅),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도 있지만 같이 지낸 세월을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 이렇게까지 만든 사람이 어찌 원망스럽지 않았겠는가. 생각해 보면 내 짝이 되어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내 기분을 맞추어 주었던 반쪽이었던 셈이다.

 처음부터 이런 마음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우리 것이라고는 하지만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 탓이었는지 가까이 가는 것도 그리 즐겨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내 것이라 하면 유형, 무형을 떠나 무척 아까워하는 편이다. 그렇기는 해도  내 것이 아닌 바에는 그저 ‘소 닭 보듯’ 무심한 것이 평소 내 소유관이기도 하다. 지나친 이기심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다지 욕심이 많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먹을 수 없는 그림의 떡이라는 생각이 앞선 까닭에서다. 그러니 차에 대해 ‘쓸고, 닦고, 기름 치고, 조이는’ 것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그런데 혹 한 번씩 이용할 기회가 생기기 시작했다. 남의 귀중품을 빌려 쓰듯 조심해 다루는데 이것이 아양을 떨 듯 서서히 즐거움을 주는 재미가 여간 아니다. 그래도 여전히 내 것이 아닐뿐더러 그동안 무심했던 것이 차 주인에게 미안하기도 하여 조금씩 마음을 감추고 애써 모른 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어느 사인지 나도 모르게 가만있는 녀석을 툭툭 치는 사이가 되어 주차장에서 만나면 멀리서도 알아보고 괜히 반가웠다. 여기저기 상처가 있는지 훑어보면서 간혹 있는 상처에도 마음이 상했다. 그러다 보니 가끔 생각이 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내 것이 되어 아무 때나 어디든 함께 데리고 다닐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마치 해서는 안 될 사랑이 서서히 시작되듯 눈치 채일 것에 조심하며 속으로만 애틋했던 것이다.

 그 후 4-5년이 지났을까. 완벽한 소유라고 할 수는 없어도 명분 상 내 것이 되었다. 내색하며 반가워하지는 않았지만 무척 좋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둘이 있는 시간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내 뜻을 거역하는 법이 없었으며 늘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나를 위로하는 것이 가족보다 더해 가끔 나를 오만하게 만들기도 하였을 텐데. 하여, 녀석을 어쩌다 무례하게 다루었던 적도 있었겠지만 여전히 마음에 드는 친구가 되어 나를 기쁘게 했다. 웬만하지 않으면 누군가의 동승도 피하고 둘이 있는 것이 좋아 목적지를 돌아 마냥 어디든 가고 싶었다. 운전석에 앉으면 유난히 많은 생각들이 어지럽히곤 하는데 어쩌다 그러고 나면 정리가 되어 머릿속이 개운했다.

 더욱 고맙게도 이런 나를 위해 원 주인은 시간만 나면 거두어 주는 것 또한 좋아했다. 무엇보다 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듣기에 빠지는 것이 안 되었던지 아주 괜찮은 CDP로 바꾸어 주었고 될 수 있으면 기름도 가득 넣어 놓으려고 하였다. 낡기도 한 탓이지만 항상 정비에 신경을 썼으며 깔끔하고 쾌적한 조건을 유지시켜 주려고 애를 썼다. 그 덕에 나는 옆에 두고 내 뜻대로 해도 좋을 것 같은 생각만 하며 필요에 의해, 기분에 의해 일심동체가 되어 마냥 즐거울 수 있었다.

 둘이 길 따라 멀리 가는 것을 나는 가장 좋아했다. 집으로 돌아올 때쯤 비라도 오는 경우 가슴 두근거림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깡통 소리가 요란한 빗소리를 차내에서 듣고 있노라면 마치 ‘비포 더 레인’이라는 음악 속에 내가 있는 듯하다. 한적한 시골 외길을 갈라 치면 녀석이 긴장하는 것을 느끼게 되어 거꾸로 그를 다독여야 할 때였다. 그랬던 녀석이, 그렇게 충복(忠僕)처럼 내 곁에 있다 이제 충복이 되어 무슨 우연이었는지 빗속에서 목숨을 끝내고 말았다.

 함께 있을 때는 건성이었는데 거리를 가다 보니 왜 그처럼 같은 번호에다 비슷한 번호가 많고 같은 색의 차종까지 만나기를 자주 하는지. 그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짜안 하니 그리워진다. 영원히 나와 함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쉽게, 망하게 보낼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유 씨 부인의 개탄처럼 주인의 부주의 탓에 험하게 생을 마치게 한 것이 말할 수 없이 미안하다. ‘그래도 얘야, 함께 있는 동안 너는 내 자랑이었단다. 이제 안녕, 잘 가거라. 참 행복했다, 그리고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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