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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희 Jul 09. 2022

  괜히 그랬나 봐요

    

 영국 작가 제니 조지프의 작품 ‘Warning’라는 시가 있다. 젊어서 조신하게 산 것을 벌충하기 위해 ‘길에다 침 뱉는 것을 배워보고, 이웃집 꽃도 꺾어 보고, 빨간 모자를 쓰고 자주색 옷도 입어보고, 지팡이로 이웃집 담도 드르륵 긁어 보고, 연금은 사고 싶은 것에 모두 써버려 버터 살 돈도 없이 해 보고...’ 주로 이런 내용이다.

 열심히 사는 것이 당연한 듯, 나를 먼저 생각하지 못하다 나이 든 사람들, 그렇게 살다 나이 들 것을 예감하는 사람들. 그들 생각은 조금씩 비슷한가 보다. 처음 이 글을 만났을 때 입꼬리를 올리며 찻물을 올렸던 기억이 난다.      


 조금 다른 내용이지만 일전에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다.

60대를 마치고 있는 어느 가장의 푸념인 듯 넋두리였는데 듣는 나로서는 가슴이 뭉클했다. 괜히 담배를 끊었나 봐요, 하면서 궁금하게 했다. 그는 20대 늦게 결혼해서 좋아하던 담배도 끊고 술도 끊으면서 정말 열심히 살았단다. 조금씩 친구들도 덜 만나면서 집도 사고 세 아이 공부시키고 두 아이도 출가시켰단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괜히 좋아하던 담배를 끊은 것 같다며 연거푸 몇 번을 괜히 끊었나 봐요, 괜히 끊었나 봐요, 한다. 쓸쓸하다고만 하기에는 부족한 회한이 진하게 왔다. 가장으로서 온갖 무거운 책임이 오히려 그의 힘이었겠지만 지금에 와서 그는 억울했나 보다. 듣는 나로서는 통증까지 느꼈다.

 그렇다고 그가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산다고 해서 좋아하는 담배를 피우며 살지는 못할 것 같다. 비록 힘들었지만 잘 이룬 가정이 주는 안정감에 누구 못지않게 살아온 것을 후회해서가 아닐 텐데. 왜 억울했을까.    

 

 어쩌면 억울한 것은 그가 아니라 내심 나인가 보다.  가끔 지금 모습을 오래전 모습에 반추해 볼 때가 있다.  부끄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 있게 내보일 정도가 아니니 썩 만족스러운 삶도 아니라는 반증일 터이다. 뿐만 아니라, 지나온 날들이 이기심을 되도록 배제한 양보와 배려가 우선이었고 눈살 찌푸릴 비도덕적 양심으로 살지 않았으니 이제 다른 모습으로 살고 싶은 부딪침도 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참 재미없고 매력 없는 삶이었다.

 시처럼 우선 외양부터 달라지고 싶을 때도 있다. 짧은 커트 머리에 귀도 뚫어 찰랑대는 귀걸이를 걸고 한번 힘차게 걸어볼까 하는 생각.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길 따라 며칠이고 떠나고 말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좀 더 젊었다면 이랬을 텐데. 그러다 마음에 드는 곳에서 뒤통수를 맞고 기억상실증에 걸린 듯 과거는 완전히 잊은 채 새로운 곳에서 어설프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나이도, 딸이라는 것도, 엄마라는 것도, 아내라는 것도 잊고 새롭게 살아보고 싶은 마음에서다.

 그러다 망가진 울타리도 고쳐주고 일거리도 가져다주는 늙수그레한 이웃 홀아비를 만나 마음을 주어 살아보는 것이다. 추억도 버리고 기억도 버리고.     


 다시 시인은 말한다. 그런데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깨끗한 옷을 입어야 하고,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해서 욕도 하면 안 되고, 신문도 읽어야 하고. 또 집세도 내야 한단다. 웃음이 빵 터졌다. 어쩌면 영원히 실행하지 못할 시인의 바람이라는 걸 알려 준다.


 그렇다. 내일모레 구순인 노모가 홀로 계시고 결혼을 마다하며 여전히 엄마를 따르는 두 아이가 있다. 나야말로 갚아야 할 대출도 조금 남았다. 그러고 보니 애써서라도 나보다 오래 살아야 할 늙수그레한 남자가 이곳에도 있다는 것을 잊었다. 무엇보다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다.


 앞서 60대 가장에게 억울할지 모르는 이유가 혹시 있다면 보상이 없어서는 아닐까. 사랑에서 온 희생과 헌신이었다고 하지만 지금에 와 감사와 경의를 받지 못해서가 아닐까. 누군가 대신 치러주는 값을 누렸다면 반드시 보상이 있어야 한다. 고맙다고, 수고했다고, 덕분이었다는 따뜻한 토닥임이라도. 박민규의 ‘낮잠’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그러니 이제 억울하지 않게 나라도 나한테 보상을 좀 해줘야겠다. 시인은 조금씩 변화를 연습하며 살아보겠다고 했으니 아직 시간이 넉넉한 듯하지만 이제 그럴 기운이 내게는 많지 않다. 당장 좋은 차를 사서 잠자리 날개 같은 원피스를 입고 멋진 귀걸이를 달랑대며 떠나봐야겠다.

 그런데 친구가 한 마디 한다.

 “ 영화 좀 그만 보라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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