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희 Mar 12. 2023

그럼에도, 나는 내가 좋다


 어쩌다 어른이 되어 버린, 혹은 될 우리에게 신선함을 일러 주는 토크 프로가 있다. 흥미롭게 보다 보면 그동안 실수에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슬그머니 웃기도 하고 미성숙했던 나를 새삼 반성하게도 한다. 그렇다고 맥 놓고 있다 느닷없이 어른이 된 것은 아니지만 20대 이후 어른으로 다소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인간관계에 종종 당황할 때가 있었다. 한 번은 좋은 사람들끼리 만남이라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는 모임이 있었는데 가끔 얼굴을 비치기는 해도 꽤 애정이 있어 그곳 사람들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유독 친절한 이가 있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다. 부담스러움이 그의 친절만큼 내 호응은 지극히 형식에 지나지 않게 했다. 


 어느 따뜻한 봄날이었나 보다. 외부에서 그를 만났는데 반갑게, 그것도 그날따라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었건만 낯선 사람을 보 듯 나를 대한다. 저 이가 인사를 받지 못했나 하면서 다시 적극적 자세로 알은체를 했는데 또다시 데면데면하는 것이 언짢을 정도였다.  


 돌아와 내내 궁금했다.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예전대로다. 혹시 내가 큰 실수를 하여 불쾌한 적이 있었는지 사과를 전했더니 무슨 소리냐며 놀라는데 오히려 내가 놀라웠다. 찬찬히 지난번 일을 설명하자 그랬느냐고 순진한 얼굴로 묻기까지 한다. 아, 이제는 내가 데면데면해도 결례는 아니겠구나. 부담스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반성했다. 부족했을 내 어른다움에.


 얼마 전 일이다. 절친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서로 좋은 느낌으로 가까이 지내는 이가 있다. 둘은 개인적인 시간도 자주 가지고 개인적인 이야기도 서로의 이야기처럼 들어주는 사이가 되었다. 가끔 진심으로 서로를 부러워하기도 하고 칭찬도 하며 상대를 철저히 배려해 주는 사이이기도 하다. 이 정도면 사람 사귀기 힘든 나로선 나이 들어 파격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우리에게 무슨 일인가 뜻을 모아 함께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엄밀히 말하면 그가 하는 일에 내가 영입되는 일이다. 차츰 그가 불편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감지하게 되었다. 도대체 왜 그럴까? 그러면서 조금씩 거리를 두게 되었고 말투도 사무적으로 변하면서 시나브로 쓸쓸해져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의 기복은 커졌다. 마침내 그도, 일도 없었던 것으로 돌려 버리고만 싶었다.

 

 우연히 그의 말에 놀랐다. 내가 민감하다는 것에. 그렇다고 모든 것에 민감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 그가. 그렇다면 그의 말과 행동이 나를 민감하게 했다는 것을 모르는 그에게 놀라고 말았다.


 어쩌다 어른이 된 우리는 자기 생각만으로 이렇게 서로에게 이기적이어서 서로를 낯설게 한다. 혹시 아쉬운 배려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또 반성하게 된다. 부족한 내 나이 듦을.


 시간이 갈수록 사는 데 더 귀한 것과 무엇이 우선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이 사회에 살면서 물질적 풍요와 안락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모순일 테다. 우리 둘 시작과 다르게 점점 생활의 차이를 느끼게 하는 친구를 만났다든가 혹한을 피해 따뜻한 동남아에서 한겨울을 살다 온 친구를 보면 약간의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으니 현실이 왜 원망스럽지 않았겠는가.


 그런데도 점점 아둔할 정도로 사람에게 맹목적인 가치를 두게 된다. 할 수만 있다면 곁에 있는 사람들과 오래오래  만나고 싶다. 그래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 그러기 위해 좋은 말을 하는 것. 좋은 생각을 하는 것. 더 많이 이해하고 양보하는 것. 어지간한 것에 화내지 않는 것. 교만일지 모를 이런 것들에 욕심을 내어 본다.


 어쩌면 가질 수 없는 앞선 것들에 대한 애증이 이처럼 범상한 것들에 가치를 두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 노력하는 것 또한 진실이다. 어쩌다 점점 나이 들어가는 과정이리라.

 

 그렇다고 이 긴 세월을 살면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적이 왜 없었을까. 앞으로도 알게 모르게 그럴 터인데 그렇다면 내가 좀 더 아프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 새롭게 사람을 사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었다. 선택만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새것보다 오래된 것을 좋아하고 그래서 진보보다 보수 쪽에 가깝고, 남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으며 슬픈 일에 더 슬퍼해 주고 기쁜 일에 더 기뻐해 주는 사람. 도드라지게 오만하지 않고 무엇보다 신의를 버리지 않는 사람, 그런 이가 하나 정도 곁에 있다면 그런대로 세월이 가는 것이 아쉽지 만은 않을 듯하다.


 쉽게 가까워질 수는 없지만 가까워지면 쉽게 멀어지지 않을 사람. 붙임성은 없지만 살갑기도 한 사람. 싫은 것과 좋은 것이 뚜렷하기는 해도 알아도 모른 척하는 사람. 그런 이가 좋다.


 지나친 칭찬도 지나친 폄하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 말수는 적어도 그렇다고 가끔 독설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 까다롭고 재미없어 원하지 않는 것에는 관심이 없지만, 마음을 열면 무엇이든 열정적인, 어디 그런 사람  없을까.


 나는 그런 사람이 좋다. 그럼 너는 그런 사람이냐고 누군가 따진다면 '내가 아는 나'는 그런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해 줄 수 있다. 그러니 나와 같은 이가 네 곁에도 어쩌다 한 명쯤 있어도 괜찮지 않겠느냐고 말해 주고 싶다. 


 그런 내가 나는 좋다.     

작가의 이전글 뒷모습(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