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을 열어보니 더 이상 걸어놓을 수 없으리만치 옷이 가득하다. 벽 한가득 꽉꽉 들어차 있다. 책장에는 아직 읽지 않은 책이 빼곡하다. 필기구만 해도 한 박스는 거뜬하겠다. 뭐가 이렇게 많냐. 책상 옆으로 책상을 이어 붙여 잡동사니를 몰아 놓았다. 베란다에는 외면하고픈 짐들이 한가득 다 내 거다.
여행 시절 내 배낭 무게는 9킬로그램이었다. 하나가 생기면 하나를 줘 버렸다. 하나를 먹으면 하나가 생겼다. 무게는 귀신같이 늘 같았다. 가진 게 없어도 마음이 넉넉했다. 필요하면 생겨날 걸 아니까 부족할 게 없었다.
지금 나는 가진 게 너무 많다. 잃을 것도 많아졌다. 그런데 오히려 불안하다. 켜켜이 쌓인 물건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하다. 저것들이 다 마음의 짐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자꾸 6개월만, 1년만, 아니 1년 반만 하고 미루는 중이다. 뭐를? 여행을.
이젠 도저히 안 되겠다. 내 것이라 추정되는, 일컬어지는 것들을 처분해야겠다.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나의 커리어가 빛나지지도 나의 실력이 일취월장하지도 나의 마음이 평화로워지지도 않을 걸 안다. 시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도망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회피한다 하면 맞는 말이다. 할 일이 남았다 하면 어차피 끝이 없다 하겠다. 지금이다. 못다 한 여행을 마치러 그럼 이만. 내일이 없는 것처럼 나는 이만. 온몸에 바람소릴 채워 넣고 다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