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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단비 Oct 13. 2020

우울한 삶(번외)_우울에 관한 시

늪지대의 밑에는     


주사를 맞고 나서는 눈물이 나지 않는다

얼얼하게 붕 뜬 기분으로 커피를 휘저어 보지만

얼음과 춤추는 커피는 내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는다

자칫하면 붕붕 끌려 들어가는 것

늪지대의 밑바닥엔 오래된 거울이 있다


거울에 비친 나는 겹겹이 겹쳐 있다

겹쳐진 나는 물이 번진 수채화가 되고

거울은 비닐처럼 얇아진다

비닐 사이사이엔 이름이 없다

날 부를 수 있는


번지고 녹아내린 비닐 사이로

피가 흐르고 관절이 굽는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자리를 본다

숨이 내비치는 자리를



우울

     

지는 것을 보며 가져선 안 될 마음이 있다 

가장 간절한 마음 

쉽게 뱉을 수 없는 것 

버릴 수도 해 버릴 수도 없는 

내 손에 단 한 번도 쥐어진 적 없는 것

     

흔한 말들은 쉽사리 뱉어진다

말들의 마음은 터져 버린 것

이미 피고 진 재 같은 것

재로 쓴 글씨는

내 눈에 단 한 번도 보여진 적 없는 것

     

피어남은 죽어버림과 같다

가장 귀한 말

내 손에 잡힐 수 없는 것

잿더미를 찾아 헤매는 것

내 곁에서 단 한 번도 사라진 적 없는 것 

          


우울 2

     

그 자리는 비어 있지 않다

돌이 든 풍선은 둥 떠 있다

그 뒤에 숨겨진 돌을 느낀다

돌은 언제든 튀어 오르려 한다

어째서 풍선은 터지지 않는 걸까

     

그 자리의 뒤엔 가시가 있다

밝은 노래를 듣는다

노래는 희망을 노래한다

희망을 노래하고,

노래하고,

노래해서

               


공허의 냄새     


빈 의자엔 앉은 이가 없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는 뾰족한 바위 위에 놓여 있다. 끼익, 끼익 바람에 따라 의자는 기웃거린다. 의자는 비어 있지 않으나 다리는 설키게 엉겨 있고 갈라진 틈새는 촘촘하다. 오래된 서재의 냄새가 이곳에서 풍겨 나온다. 아마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작은 방. 태어남은 죽어감과 같다. 죽어감의 끝에는 나무가 있다. 나무는 서재의 아래 누워 있다. 누워버린 나무에서 곰팡내가 난다. 죽어버렸을 때부터 풍겼을 냄새. 냄새는 절벽을 따라 내려온다. 기어이 뿌리에 닿아서 다시 절벽으로 나무로 서재로 작은 방으로 바위로 의자로

               


터널의 그림자

     

“춤을 춰봐

빨간 옷이 하얗게 물들 때까지 

춤추는 당신이 둘이 되는 게 좋아

구두가 당신의 그림자를 짓밟아

커피가 차게 식을 때까지”

     

둘이 된 나는 하나를 잃어버렸다 

그곳에 놓고 온 것 

회색인 사람들의 얼굴과 딱딱한 지하철은 

멍한 표정으로 누워있는 날

터널 속으로 치고 들어간다

      

정말 생리 중이야? 한번 만져봐도 돼?

손은 개찰구를 통과한다 

터널에 빨려 들어가기 위해

    

터널은 아무 말이 없다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뉘어진 채

빨려 들어가고, 나오고 또다시

빨려 들어가고,

    

기억은 멍처럼 그림자를 남겼다

철로처럼 긴 멍을 바라보며

그곳에 눕지 말았어야 했다고

     

누운 나를 

씹고 뱉는

터널의 발자국               



cover up 

    

점들은 파란 잉크를 새긴다 파란 잉크는 그어진 흔적을 지운다 다시 그어지지 않도록 지워질 수 없는 어제와 지울 수 있는 내일을 새긴다 그러나 내일도 지워질 수 없었던 것이다 지울 수 없었던 내일은 점들의 아래에 그어진다 전보다 넓게 그러나 얕게 점이 아니라 여린 선으로 얇게 얇게 별의 아래에 꼬리를 긋는다 꼬리는 하얀 잔해와 까만 점들을 남긴다 너의 과거는 어째서 지울 수 없는 걸까 너의 미래는 어째서 지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지워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지울 수 있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다 덮어질 수 있다고는 생각했던 것도 같다 덮어지는 것은 더 깊게 새겨지는 것 덮었다고 생각한 것들은 더 깊이 묻혀있던 것 이따금 위로 떠오르면 어째서 아직도 덮어지지 않은 건지 어째서 선은 계속 그어지고 있는 것인지 어째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것인지 어쩌면 그때 지워져야 했을

     

나에 대해 생각한다

지워질 수 없다면 덮어져야 할까 덮어질 수 없다면 파묻혀야 할까 파묻힐 수 없다면 존재해야 할까 존재할 수밖에 없다면 살아 있어야 하는 걸까 살아 있어야 한다면 선을 그어야 할까 선을 그을 수밖에 없다면 전보다 넓게 그러나 얕게 점이 아니라 여린 선으로 얇게 얇게 별의 아래에 꼬리를 그어내어 적당히 살아 있는 만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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