삵은 자신을 채워줄 사랑을 했다.
우리는 많이 아팠다. 새빨간 나와 새까만 그. 열아홉의 우리는 서로를 만나 보듬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하며 같이 자랐다. 영화 노트북의 한 장면처럼 도로 위에 누웠던 기억, 밤거리를 밤새 함께 걷던 기억. 거친 싸움과 눈물과 무너짐의 기억. 그 모든 기억이 차곡차곡 쌓여 11년이라는 세월이 됐다. 11년이라는 시간의 끝은 나쁘지 않았다. 싸움도, 일방적인 통보도 아니었다. 더는 연인이 아니기로 하자는 내 제안을 그가 수락했고, 그렇게 우린 연인이 아닌 관계가 되는 것에 합의했다. 그런 시간을 누군가와 함께 보내고 그런 이별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준 그에게 무척 고마운 마음이다.
우리는 행복했다. 어느 곳에 서 있지도 마음 두지도 못한 채 방황하던 두 사람이 만나 서로에게 마음과 몸을 뒀다. 서로의 아픔을 고백하고 안아줬다. 우리는 아이가 되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것만 같았다. 마음껏 어리광 부리고 마음껏 다투었다. 물론 때로는 힘든 일도 있었다. 라면으로 생계를 유지해야만 하던 때가 있었고, 차비가 없어서 다섯 시간을 걸어 서로를 만나야 했던 때도 있었다. 그는 갑자기 병을 얻었고, 나는 그런 그를 돌보아야만 했다. 함께 기르던 강아지가 죽어버린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모두 행복했다. 마주 보고 웃고 울었던 시간. 우리는 11년 내내 행복했다.
우리가 헤어지게 된 것에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와의 삶이 아닌 온전한 나의 삶을 살고 싶은 마음, 그게 이유였다. 우린 스물한 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함께 살았다. 시간으로는 구 년 여의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 안에 채 담을 수 없는 많은 것들을 함께하면서 나눴다.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언쟁을 하고 화해하고 웃고 울고 떠들던 시간. 그는 나를 그의 세계에 들였고 나는 그의 세계를 사랑했다. 그는 나를 자기 세계에 들어와 사는 다람쥐 같다고 말했다. 그는 내게 나무였다. 줄기가 꺾일 때는 내 마음이 꺾이는 것 같았고 잎이 떨어질 때는 그 잎들을 전부 주워 담아 내 마음 안에 밀어 넣었다. 그와 나는 거의 하나였다. 정말로 거의.
세계와 세계가 만나는 사랑을 하고 싶었다. 아니, 나의 세계를 먼저 가지고 싶었다. 그의 세계 안에 사는 것은 안락했지만, 한없이 나를 작아지게 만드는 일이었다. 내 날개를 꺾고 접어 그의 속 안에 나를 욱여넣는 기분. 그것은 내 선택이었다. 갑자기 떠나버린 사랑, 갑자기 접혀버린 나의 존재에 대한 불안은 누군가와 하나가 되기를 강력하게 종용하고 있었다. 나의 불안을 누군가가 채워주기를, 그게 내가 사랑하는 그이기를 나도 모르게 바라고 있었다. 나의 존재와 사랑의 빈자리를 채워주기를. 그러나 내가 정말로 바라는 것은, 그 빈자리를 안고도 살아갈 수 있게끔 해 주는 나의 세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우리가 보였다. 우리에게는 사랑보단 관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 인생이 여기서 끝나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 할 앞날이 눈 앞에 펼쳐지는 느낌. 스물아홉은 그러기에 너무 이른 나이가 아닐까 싶었다.
이사 갈 집을 구하고 가구를 샀다. 내가 좋아하는 색깔의 가구들로 집을 꾸미고 좋아하는 음악을 온종일 틀어놓았다. 먹고 싶은 걸 먹고 싶은 만큼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싶은 만큼 잤다.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사람들을 집에 초대했다. 그러나 세계는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게 아니었다. 모든 것을 완벽에 가깝게 세팅해도 나의 세계는 도무지 모습을 드러낼 줄을 몰랐다. 나는 늘 바빴지만, 마음은 늘 비어있었다. 발이 붕 떠 있는 기분. 공허는 그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잊고 있었던 감각이었다. 첫사랑이 떠나버린 후, 그리고 어쩌면 그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나의 빈자리.
채워진 자리가 뿌리째 뽑혀나갔기에 흙을 메우고 다시 나무를 심어야 했다. 어떤 나무를 심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나는 나를 너무 모르고 있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있었다. 이제는 내 삶을 온전히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 다른 이의 삶을 책임이라는 명목 하에 내 자리에 두지 않아야 한다는 것. 나는 그를 책임지려 했고 나를 책임지지 않으려 했다. 그를 위해 살았다. 자살이나 자해의 충동이 몰려올 때는 그를 생각했다. 그는 내게 나무이기도 했으나 나의 다람쥐이기도 했다. 그의 세계와 나의 세계는 온통 서로 뒤엉킨 채 얽혀 있었기에. 그가 아팠을 때 사실은 직감했다. 그가 괜찮아진다면 우리가 헤어질지도 모르겠다고. 내 직감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내가 내 삶을 살고 싶다고 결심한 순간은 그의 병이 점차 나아질 시점이었다. 그는 내 결심을 받아들이고 응원해줬다.
그에게 무척이나 고맙다.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자주 했다. 열아홉이라는 나이에 우리가 만난 건 정말 행운이었다고. 서로를 만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버틸 수 없었을 거라고. 새까맣고 새빨갰던 두 영혼이 만나 서로에게 기대어 나아갈 수 있었다고. 얽혀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너무 어렸고, 너무 불안했고, 너무 아팠기에. 우리가 홀로서기를 결심하고 또 그 홀로서기를 응원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서로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만큼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서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기에. 그는 우리의 이별을 영화의 한 장면이 마무리되고 다음 장면이 시작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지금까지의 우리는 끝이 났지만, 지금까지의 우리가 있었기에 다음 장면이 시작될 수 있었다고.
그는 여전히 내 곁에 친구로 남아있다. 4차원 식구 중 한 명으로, 내 가장 가까운 친구로. 그는 아주 잘 살아가고 있다. 그가 날 응원했듯 나도 그의 삶을 응원한다. 우리는 무척 아팠고 무척 행복했다. 그리고 무척 서로를 아꼈다. 지금도 우리는 친구로서 서로를 아끼고 있다. 아무리 말해도 채워지지 않는 말, 그에게 고맙다는 말. 그는 내게 힘들거나 버거울 때, 고민 있을 때, 괴로울 때, 심심할 때 언제든 대화하자 말한다. 이제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있는 게 아닌, 너와 나로서 우리는 대화를 나눈다.
나의 두 번째 사랑은 이러하다. 서로를 채웠고 또 서로를 놓아준 사랑. 누굴 향한 미움도 없던 사랑. 욕망을 가질 힘을 서로의 손에 쥐여 준 사랑. 이제 우리의 삶은 각자의 책임이다. 나는 더는 누구의 삶도 책임지지 않을 것이다. 나의 삶을 온전히 나로 채울 것이다. 그와의 시간이 준 힘으로 흙을 다지고 나무를 심을 것이다. 물론 여전히 어떤 나무들을 나의 땅에 심어야 할지는 모르겠다. 그저 조금씩 시도해 볼 뿐이다. 그는 그런 나를 위태롭게 보면서도 잘 해내기를 응원한다. 그의 응원을 신뢰한다. 그 또한 나의 응원을 신뢰하고 있을 것이다. 더는 그를 사랑하지 않지만, 인생의 불확실성 속에 서로를 응원하는 우리 관계를 나는 여전히 사랑한다. 그리고 더 잘 살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이제는 그가 아닌, 나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