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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단비 Oct 13. 2020

사랑하는 삶 (4)

삵은 사랑의 힘을 믿었다. 



   

누군가 내게 그랬다. 내가 태어난 이유는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고. 아마도 내가 가진 사랑의 방식 때문에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내가 겪은 사랑이란 사랑에 나를 던진 시간이었다. 사랑에 자신을 던지는 건 미련한 사람이나 하는 짓이다,라고 온 세상이 외치는 지금이지만 나는 사랑에 나를 던졌다. 나를 걸었고 나를 채웠으며 나를 있는 그대로 내보이고 또 받아들인 세 번의 사랑. 추락하던 나를 상대로 채운 사랑, 서로를 채웠고 또 서로를 놓아준 사랑, 서로를 알아보고 받아들였고 이제는 서로를 이해해가려는 사랑. 세 번의 사랑은 나를 뒤 흔들어 놓았고 바꿔 놓았으며 또 나를 찾게 해 주었다.


사랑에 나를 던진다는 것은 쿨한 사랑과는 대척점에 있다. 나는 사람 자체가 쿨하지 못해서 그런지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쿨하게 만날 줄 모르고 쿨하게 보내줄 줄 모른다. 마개를 뺀 욕조에 물이 빨려 내려가듯 사랑에 미끄러져 내려가 버린다. 어디로 갈지도 모른 채 그대로 사랑이라는 물길에 나를 맡겨버리는 것이다. 당연히 위험하다. 그런데 나는 사랑을 그렇게밖에 할 줄 모른다.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사랑을 위해 목숨을 내걸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는 사람인 양 행동하고 살아왔다.


그럼 나의 사랑은 수동적인 사랑인 걸까. 내 사랑에 내 주체성은 없는 것일까. 사랑에 빠지는 것과 사랑을 선택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내 생각은 이렇다. 시작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과정을 선택하는 것. 사랑의 시작에 선택권은 없다. 사랑에 빠진 이 중 누구도 스스로 그 상황을 선택한 이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사랑을 유지하고 가꿔나가는 일에는 많은 선택을 해야만 한다. 아니, 1분 1초 매 순간이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언제든 헤어질 수 있는 관계, 언제든 막을 내릴 수 있는 가능성을 품은 것이 연인이고 사랑이기 때문이다. 언제고 뛰어내릴 수 있는 기차와 같은 것. 


기차에 탄 나는 등 떠밀려 떨어지기도 하고 스스로 기차를 멈춰보기도 했다. 내가 지금 이 기차를 내 의지로 타고 있는 것인지 고민하기도 하고 운전석과 좌석 사이에서 고민하기도 했다. 사랑은 고민의 연속이다. 선택은 늘 고민을 수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민과 선택은 주체성을 극명히 드러낸다. 재밌는 것은 선택지가 많지 않을수록 선택의 힘은 더 커지고 그만큼의 주체성도 힘을 얻는다는 것이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선택의 순간에서 기어이 해낸 하나의 선택은 내가 나로서 선택했다는 느낌을 느끼게 만든다. 흔히 말하는 사랑의 힘이라는 건 그런 것 아닐까. 어쩔 수 없는 순간에서 기어이 사랑을 선택하는 그 힘.


사랑의 힘은 외부에서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이, 사랑받는 이 그 둘의 내부에서 피어오른다. 그것은 꼭 사랑의 힘에 국한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힘은 누구나 그 내부에서부터 나온다. 상황이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 나에게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살아가게끔 하는 상황을 무엇보다 강력하게 조성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안 그래도 쿨하지 못한 나는 사랑에 있어서 더더욱 쿨해질 수가 없다. 사랑이라는 강렬한 느낌을 붙잡고 도무지 놓아줄 줄을 모르는 것이다. 그냥 이렇게 타고난 것일 수도 있지만, 주관적 느낌과 주체성이 훼손당한 경험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모성의 도구로써 사용되었던 기억, 그리고 조금 더 자라서의 폭력의 기억들. 그 기억들은 분명 나의 주체성을 훼손했다. 훼손된 주체성과 자아는 내가 ‘나’라는 느낌을 느끼기 어렵게 만든다. 나는 여전히 내 주관적인 느낌을 잘 느끼지 못한다. 그만큼 강렬한 느낌에 대한 집착이 있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주관적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강렬한 느낌을 가져다준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사랑은 내게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한때는 내 인생이 반쪽짜리가 아닐까 의심했을 만큼 사랑은 내 인생의 절반 혹은 그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그러나 지금은 내 인생의 반쪽을 사랑에 내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의 과정은 주체적이기 때문에. 사랑이 내게 중요한 만큼 나는 매 선택의 순간마다 최선의 선택을 해야만 했다. 치열하고 정확하게 선택에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나로서 살아있는 순간들이었다. 지금은 안다. 그것이 나의 삶이었고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방점을 ‘나’에 찍기로 했다. 사랑에 미끄러져 내려갔으나 나는 그 순간에도 신나게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기차에서 등 떠밀려 떨어지는 순간에도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기차를 멈춘 건 두말할 나위 없이 나 자신이었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순서가 바뀌었다. 나는 태어났기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다. 살아가기 위해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살아갈 수 있는 삶을 살아온 것이다. 의존이 아니었다. 내가 사랑에 속해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내게 속해있는 것이다. 사랑에 끌려다닌 것이 아니라 난 늘 사랑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내 힘이었다. 사랑을 철 지난 옛말이라고 생각하는 세상이지만 내 선택을 부끄러워할 필요도 후회할 필요도 없다.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안의 힘이기 때문에.


지난 글에 썼듯이 사랑이 밥 먹여 준다는 말을 나는 믿는다. 물론 그 자체가 밥을 떠먹여 줄 순 없지만, 밥을 떠먹을 수 있는 힘을 사랑은 확인시켜 줄 수 있기에. 내 인생에서의 사랑은 이러하다. 달리는 기차에 기꺼이 올라탈 수 있는 것, 끊임없이 고민하고 선택하는 것, 내 안에서 발현된 힘이자 내 힘을 비춰 준 등대 같은 것. 이제 나는 사랑을 내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다. 사랑은 내 안의 힘을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에. 그러나 사랑은 여전히 내게 아주 중요한 것이다. 살아있는 이상 나는 누군가를 사랑할 것이고 또 끊임없이 선택할 것이기에. 내 인생의 자리를 사랑에게 내어주진 않았지만 내 인생엔 그래 왔듯 사랑이 있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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