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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단비 Aug 27. 2021

몽유병 - Ego Function Error

 -  ‘음악 쓰기’는 한 곡을 반복해서 들으며 의식의 흐름대로 써 내려간 글의 모음입니다.


https://youtu.be/m8GooW6TVdY

몽유병 - 에고 펑션 에러(Ego Function Error)


새벽 3시쯤 되었을까. 서울이라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풍경이 여기 있다.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어느 작은 골목, 그리고 그 골목을 비추는 가로등들. 그중 한 가로등이 깜빡인다. 비가 왔는지 땅은 젖었다. 아스팔트 위에 유리처럼 깔린 빗물은 가로등 불빛을 비춘다. 깜-빡, 깜-빡. 그 리듬에 맞춰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뚜벅이기보다는 찰박이는 발걸음 소리는 다소 느리다. 검은 실루엣이 보인다. 그 모습은 걷기보다는 마치 춤추는 듯한 몸짓. 느릿한 움직임. 좌우로 흔들리는 몸.


자세히 보니 그가 아니라 그녀다. 그녀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다. 다문 입과 흐릿한 눈동자. 그녀가 입고 있는 것은 스마일이 크게 그려진 노란 원피스였다.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그녀의 발은 마치 땅 위에 둥둥 떠 있는 듯하다. 신발은 신겨져 있지 않다. 차갑게 젖은 아스팔트를 밟으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유령처럼 헤매는 그녀의 걸음은 마치 줄에 매달린 인형 같다.     



    

“인형 같아.”


내게 이렇게 말하는 너의 얼굴에 미소가 보였다. 아마 예쁜 마론 인형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 못난이 인형이나 곰 인형, 강아지 인형에 가깝겠지. 어디로 보나, 누가 보나 그렇다. 통통한 볼을 가진 나는 혀를 내민다. 다시 춤인지 뭔지 모를 몸짓에 몰두하는 나. 들리는 음악은 Remi Wolf의 Photo ID. 너의 앞에서는 건전지가 딸깍 소리를 내며 꽂혔다. 건전지가 꽂힌 나는 작동을 시작하고 나의 작동은 너를 웃게 한다. 몸짓이라기보다는 작동에 가까웠다, 그 움직임은. 너무 많이 움직여서 그만 고장이 났나 보다. 이제는 건전지가 꽂히지 않아. AA 건전지는 이제 없다. 내 손에 쥐어진 것은 AAA뿐.


나의 눈에는 불빛이 꺼졌다. 나의 피부에는 먼지가 쌓이고 지워지지 않을 때가 묻기 시작했다. 칠이 벗겨진 나는 이곳에 덩그러니 놓였다. 모든 것은 환상이었고, 놀이공원에서 흘러나오는 주제가처럼 거짓된 희망이었다. 아아, 거짓된 희망이라니. 내 나이에 이게 무슨 철없는 말이란 말인가. 환상이라니. 희망이라니. 거짓이라니. 십여 년 전에나 떠올릴법한 단어가 아닌가. 나도, 세상도 그만큼 나이를 먹었건만.


기타 소리가 들린다. 나이를 먹은 나의 뇌를 튕기는 기타 소리가. 줄에 매달린 손이 기타 위에 얹어졌다. 힘없이 툭, 떨어지는 손을 따라 소리는 튕겨 나온다. 떨어지는 건은 손뿐만이 아니었다. 스틱이 드럼 위로 툭, 툭 떨어진다. 눈에는 여전히 불빛이 꺼져있다. 깜깜한 눈으로 까만 건반이 보인다. 까만 건반은 하얀 건반을 전부 감췄다.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것은 날카로운 비명이었다. 아니, 그 비명은 뭉툭한 체념이었다. 체념이 내는 비명은 읊조림 사이를 꿰뚫고 치솟는다. 치솟는 비명에 손을 베어버렸다. 핏방울은 음표가 되었다. 나는 그 음표를 따라 노래를 불렀다. 익숙한 멜로디, 익숙한 리듬, 익숙한 가사.


너는 내게 익숙했다. 우리는 6년하고도 3개월을 함께하지 않았나. 우리는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오선지 위에 차곡차곡 음표를 그려놓았다. 우리가 함께 음표를 그리지 않은 시간은 우리가 잠든 시간뿐이었다. 서로에게 닿지 않고 서로를 만지지 못하는 시간은 오직 그뿐이었다. 그 외의 시간은 전부 문자로든, 목소리로든, 마주 닿은 살로든 서로에게 닿아 있었다. 엉겨 붙을 만큼 닿아 있었던 우리. 그런 우리를 끊어낸 건 치솟는 칼과도 같았다. 칼은 우리의 손을 베어버리고 코를 베어버렸다. 너를 잡을 수 없고 너의 향기를 맡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은, 오직 내가 잠든 시간에만 음표가 그려진다. 너를 만나고 만지고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 나는 182cm의 거구인 네 품에 안긴다. 너는 나를 번쩍 들어 올려 좌우로 흔든다. 나의 다리는 힘없이 좌우로 흔들린다.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네 뺨에 뽀뽀를 한다. 또다시 네 얼굴엔 미소가 피어오르고 나는 다시 작동된다. 그것은 몸짓이라기보다는 작동. 자동으로 나는 네게 걸어가고 다가가고 멀어진다. 다시, 익숙한 네 품에 안긴다. 너는 나를 번쩍 들어 올려 좌우로 흔든다. 나의 다리는 힘없이 좌우로 흔들린다.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네 뺨에 뽀뽀를 한다. 또다시 네 얼굴엔 미소가 피어오르고 나는 다시 작동된다.

     


그러다가 번쩍 눈을 뜨면 덩그러니 놓인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화장실에, 길거리에, 건물 앞에, 옥상에. 덩그러니 놓인 나는 여기저기 칠이 벗겨진 모습이다. 헝클어진 머리에 더러워진 발. 그래 봐야 익숙한 동네, 익숙한 골목이다. 익숙한 걸음으로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현실감각이 사라지는 시간이다. 나의 현실은 이게 아닌데, 여기가 아닌데. 내 발은 땅에서 둥둥 떠 있다. 내가 발을 딛는 건 오직, 내 건전지가 돌아가는 그곳인데. 그곳이 내 현실인데.

     


딸깍, 현관문이 잠기는 소리와 함께 건전지가 다시 빠져버린 나는 밤새 걷던 그 길을 전부 돌고 돌아서 여기 이곳, 거짓되지 않은 허상 속에서 발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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