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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단비 Jul 31. 2020

환란의 세대 - 이랑

 -  ‘음악 쓰기’는 한 곡을 반복해서 들으며 의식의 흐름대로 써 내려간 글의 모음입니다.


https://youtu.be/NbX2BTFI1x8


벤치에 앉아있는 여자는 거친 나뭇결을 하염없이 보고 있다. 비가 내리지 않는다. 초록색은 잔인하다. 햇빛의 날카로운 단면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곁을 스쳐 지나고 있었다. 나뭇결을 보는 눈빛에는 단면이 없다. 단면도, 테두리도 없는 눈으로 바라보는 그의 머리칼은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다.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 나오는 음악은 날카롭게 그의 귀를 파고들고 있다. 파고드는 것이 아니다. 쨍-하고 내리쬐는 것이었다. 햇빛의 단면에는 음표가 그려졌다.


음표 사이를 파고드는 것은 목소리였다. 목소리는 다층적이었다. 여러 목소리가 서로 교차하고 층을 지며 걷고 있었다. 걷는 목소리의 발자국은 사뿐했다. 사뿐하지만 단면은 날카로웠다. 목소리의 단면이라는 것은, 지나가는 바람의 결과 같은 것이다. 흘러가지만 분명하게 흔적과 느낌을 남기는 것.


말들의 발자국이 그의 머리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까만 발자국이 지나간 자국은 이상하게도 깨끗했다. 말들은 그에게서부터 흘러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흘러나온 말들의 발자국이 그의 머리를 더럽힐 수는 없었다. 그는 늘 이렇게 생각했다. 이 노래 가사처럼, 늘 그렇게 생각했다.


죽어버리자. 그러나 그 말이 가지는 얄팍한 무게 또한, 그는 알고 있었다. 살고 죽는 것은 사람의 몫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죽음 앞에서 오는 무기력은 죽음을 앞둔 이만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는 죽음을 바랐기에 죽음과 삶 앞에서 무기력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것’. 무기력한 이의 무게는 종잇장보다도 얄팍하고 가벼운 것이다. 그는 곧 하늘로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헝클어진 머리는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잔인한 초록과 날카로운 햇빛은 저 아래 하나의 점처럼 멀어졌다. 발은 허공을 헤집고 있다. 앞으로, 앞으로 허공을 내딛는 그의 발자국. 파란색 원피스는 아무렇게나 날리고 뒤집어졌다. 그의 얼굴은 점점 새하얗게 핏기가 빠지고 있었다. 표정은 없었다. 단면도, 테두리도 없는 눈만이 그가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할 뿐이었다. 존재하고 있음은 증명하지만, 살아있음은 증명할 수 없는 그의 눈.


그런 그의 무기력한 손에 난간 하나가 잡혔다. 난간에는 비명이 새겨져 있었다. 목소리와 표정이 동시에 새겨져 있었다. 서둘러 난간을 잡은 그는 난간의 단면에 손을 베어버리고 말았다. 난간은 거친 나뭇결을 가지고 있었다. 잔인한 초록색의 난간이었다.     




태어나서 얼마간은 눈앞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고 해요. 저는 그때를 기억해요. 왜냐면 그때를 기억하는 저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기억하고 있는 저를 기억하는 것은 아주 편리해요. 아무리 오래된 기억이라도 잊지 않을 수 있거든요.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눈앞에 뿌연 실루엣이 보여요. 엄마일까요, 할머니일까요, 아니면 이모였을까요, 그도 아니라면 그저 어떤 ‘것’이었을까요.


한숨을 깊게 내쉬어봤어요. 아까는 잠깐, 흉통이 느껴졌어요. 아, 이대로 흉통이 계속되다 그만, -버렸으면. -버리기를 꿈꿨던 적이 있었어요. 꿈은 꿔볼 수 있는 거잖아요. 가끔 참을 수 없을 때는 단면으로 저를 베곤 했어요. 끔찍한 이야기예요. 날카로운 통증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해요. 이렇게 그때를 기억하고 있으니, 기억하는 지금의 저도 아주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아요.


또 어떤 때는 단면을 감아서 매듭을 지어본 적도 있어요. 매듭은 제 목에 꼭 맞았어요. 차마 발을 뗄 수가 없어서 눈물만 흘렸어요. 발이 허공을 헤집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제 파란 원피스가 내 발길에 펄럭이는 건 참 예쁠 것 같았거든요. 파란색이 지나가는 자리에는 물감이 흘러내릴 거예요. 수채 물감이 물에 번지듯 예뻤겠죠.


제가 가진 것 중 가장 예쁜 것은 그 원피스였어요. 제 얼굴도, 손도, 등허리도, 다리도 그렇게 예쁘지 않아요. 저는 그래서 그 원피스가 참 좋았어요. 그 원피스를 보는 순간 내가 –버린다면 꼭 이 원피스를 입고 –버릴 거야,라고 다짐했어요. 그래서 조금 비싼 가격에도 망설임 없이 사버렸죠. 


그 옷을 작년에는 7번 입었어요. 단면을 감거나 단면에 베인 시간이었죠. 7번은 많지도 적지도 않은 횟수라고 생각해요. 그때의 저를 생각해보면요, 딱 적당한 횟수예요. 그곳에 들어가기에 딱 적당한 횟수죠. 그곳에 14일 정도 있었어요. 나의 판단은 없었어요. 대답은 했지만, 그 대답이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어요. 네에, 네에.


매일 2시간의 산책 시간이 있었어요. 제 동생은 제가 담배 피울 수 있게끔 매일 저를 산책시켜줬어요. 강아지의 기분이 이런 기분이구나. 3년 전에 키우던 강아지가 –버린 일이 있었어요. 강아지도 심장이 안 좋았어요. ‘그’처럼 말이에요. 아, 그러고 보니 ‘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네요.


‘그’는 제가 그곳에 있는 동안 두 번 저를 찾아왔어요. 아니, 찾아와 줬어요. 그의 키는 182cm예요. 몸무게는 110kg 정도 됐어요. 검은 옷이나 조커가 화려하게 페인팅된 옷을 좋아했어요. 그는 다크 나이트를 백번도 넘게 봤을 거예요.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는 웃을 때 입과 입 주변이 세모가 되었어요. 광대가 한껏 올라가서 꼭짓점이 되었죠. 치아가 작고 가지런했어요. 그는 노래를 잘했어요. 그는 글도 잘 썼어요. 순수했어요. 그리고, –버렸어요.


아아, 그가 너무 보고 싶어요. 그곳에 있었던 것은 끔찍했지만, 일주일에 한 번 그를 볼 수 있다면 그곳에서도 가장 고약했던 그 방에 갇혀 지내도 좋을 것 같아요. 그가 –버리고 나서 나는 더 이상 파란 원피스를 꺼내 입지 않게 되었어요. 가벼웠던 것은 내가 아니라 죽음이라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죽음이 가볍다면, 내 삶이 무거울 이유도 없었어요.


그곳과 그와 단면과 원피스와 초록과 매듭과 목소리들과 발자국에 관한 이야기를 저는 앞으로도 계속할 거예요. 왜냐면 저는 더 이상 허공을 헤집지 않거든요. 적당한 무게감이 제 발을 땅에 착 가라앉혔어요. 가벼운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앞의 저것이라고, 저것들이라고, 이제는 알 수 있거든요. 내 눈에는 단면과 테두리가 생겼어요. 음표 사이를 파고드는 목소리가 이제는 제게서 나오는 말이 아니에요. 허공을 헤집는 발자국 들일뿐이에요. 제 앞에 놓인 한없이 가벼운 것들 중 일부일 뿐이에요. 그렇게 제 인생은 깔끔한 단면을 그리며 펼쳐지겠지요. 죽어버리지 않은 채로 살아남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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