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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단비 Sep 01. 2022

2022.09.01 손 풀기

반사된 빛은 날카로웠다. 빛을 바라보다 화면을 보니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다. 푸른빛의 잔상들이 화면을 보는 시선 위를 따라온다. 아주 날카로운 기억. 날카로운 사람. 차갑고 날카로운 사람 둘. 그게 우리였다. 그래서 우리를 보고 다른 사물을 보면 도무지 분간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내용인지, 어떤 뜻인지 분간할 수 없는 멍한 세계. 


그래서 너는 괴리감이 힘들다 그랬던 거지? 나는 그런 널 이해할 수 없었지. 왜냐면 내 세계는 어딜 보나 날카로운 빛들 뿐이었거든. 다른 세계는 상상할 수 없었어. 적당하고 뭉개진 어떤 세계를. 그래서 그 괴리감이라는 게 뭔지 잘 알 수 없었어. 


제법 모서리가 깎인 나는 그때의 나를 바라본다. 그때의 너를 바라보고 그때의 우리를 바라본다. 날카롭고 차가운 사람 둘이 만나서 꽤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지. 나이프로 그려낸 백드롭 페인팅처럼 말이야. 요즘 당신 이야기가 많이 나오던 게 이 글을 위해서였나 봐. 


날카로운 당신이 멍한 세계에 사느라 참 힘들었겠다는 생각을 했어. 대단해. 정말이야. 그런 이야기를 한 적 있지. 전쟁통에서도 노래를 부르며 다니는 아이 같다는 이야기. 아이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봄에도 당신은 노래를 불렀어. 그 노래는 동요는 아니었지. 처연한 노래를 처연하지 않게, 아이처럼 소리 높여 불러댔어. 나는 그냥 그 모습을 보는 게 좋았던 것 같아. 


이렇게 네 이야기를 하는 게 과연 괜찮은 걸까. 너는 날을 숨기려는 사람인데 말이야. 하긴, 뭉툭한 세계에서 이 얘기가 어떤 이야기인지 알아볼 사람은 몇 없겠지. 외롭지 않았어? 외로웠지? 응, 나도 그래. 외로웠어. 그리고 우리는 어떤 궤도에서 만나 함께 공전했지. 


닿지는 않으나 함께 공존하는 위성 둘. 그렇게 걷는 게 꽤 즐거웠지만 나는 적당함을 모르는 사람이잖아. 적당한 세계, 멍한 세계를 상상할 줄도 모르는 사람. 그래서 그랬어. 그래서 울고, 그래서 빈 방을 맴돌고. 그래서 그랬던 거야. 아마 당신도 이미 알고 있었겠지만. 


닿고, 닿고, 닿고, 또 닿고. 서로를 껴안고 또 껴안고 잡아먹고 먹히고 알몸으로 부딪히고. 나는 그 모든 것을 바랐지만.  나는 당신이 그 모든 것들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아니었다. 당신은 그저 뭉개진 어떤 세계를 나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었던 것뿐이야. 그래서 날 항상 위태롭게 봤지. 그럼에도 내 손을 잡고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진 않았어. 어쩌면 당신의 두려움은 거기에 있었던 걸지도. 내 손을 잡고 그 세계와 내 세계를 합쳐버리는 것 말이야. 


내게 자주 그런 말을 했지. 너는 통합을 바라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라고. 당신은 분리를 꿈꾸고 완전무결을 꿈꾸는 사람이니까. 우리는 서로 포기할 수 있는 부분이 달랐던 거야. 이 글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흘러나오고 있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야. 포기할 부분은 포기하고 감당할 부분은 감당하고, 도전할 부분은 도전할 준비가 되기라도 했다는 듯이. 


9월이야. 가을이고, 힘들었던 시절이야. 나는 널 참 힘들게 했다. 그리고 나 자신도 참 힘들게 했지. 그럼에도 참 애틋했다. 이 글이 네게 어떻게 읽힐지 상상해본다. 나는 조금 두렵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준비가 되었으면 시작을 해야지.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글들, 시간. 정말 단숨에 시작되어버린 만남. 끝을 두려워하는 나는 여전히 네 옷깃을 부여잡고 있지. 정말로 고맙게도, 그런 내 손을 뿌리치지 않고 있지. 나는 사실 두려워. 포기할 수 있는 부분이 다른 우리는 자주 두려워했지. 나는 여전히 두렵다. 그런데 정말 다행인 건 두려움으로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 회색빛으로 남아있는 너의 흔적이 차갑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것. 아주 날카로운 기억. 날카로운 사람. 차갑고 날카로운 사람 둘. 그러나 서로를 찌르지는 않았던 우리. 칼이 닿지 않는 춤을 추는 우리. 여전히 우리는 닿지 않지만 어쩌면 이제야 적당함을 만난 걸지도. 그렇게 궤도를 돌고 돌아 이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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