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며드는 것이었다. 촉촉했다. 서정적인 멜로디가 땅 위에 내려앉았다. 부드러운 고동색 땅 위에 찍힌 건 조금은 투박한 발자국이었다. 발자국은 크지 않았다. 느린 걸음은 꼭꼭 눌러 담듯 그렇게 발자국을 남겼다. 곧 무지개가 필 것만 같은 날이었다.
나는 발자국의 주인이 궁금했다. 말을 걸고 싶었으나 말을 걸 수 없었다. 이른 봄이었다. 아직은 너무 이른 봄이었고 아직 날은 서늘했다. 나는 느린 박자로 발자국을 뒤따랐다. 발자국의 리듬이 보이기 시작했다.
리듬은 물방울과 비슷했다. 작고 동그란 물방울들. 너는 참 물방울 같은 사람이구나. 투명하고 뭉그러지기 쉽지만 쉽게 사라지진 않는구나. 나는 네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싶었다. 쉽게 사라지지 않을 말들이 내 귀에 남을 것 같아서. 너는 그러나 아무 말이 없었다.
너는 크지 않게 외치는 사람이었다. 아니, 침묵으로 외치는 사람이었다. 너의 가슴속에는 뜨거운 외침들이 가득했음을 나는 조금 늦게 알아챘다. 조금 늦은 건 나만이 아니었다. 맑게 개어버린 하늘은 이미 땅이 흠뻑 젖고 난 뒤였다.
나는 모든 일을 기억하고 싶었다. 그러나 기억은 증발되듯 사라지는 것이었고 나는 기억의 빗방울들을 잡아 일기장위에 전부 옮겨놓았다. 물얼룩처럼 일기장에는 기억들이 새겨졌다. 조용히 사그라지는 음악은 웃음소리로 기억되었다.
시간이 사라진 것만 같아. 시간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네게 솔직해질 수 있었다. 시간이 사라진 이 자리에서, 나는 지금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제야 지금의 나를 네게 내보일 수 있었다.
애쓰고 있구나. 느린 발자국은 애쓴 너의 흔적이구나.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나요. 저는 안녕하지 못한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저는 여전히 걷고 있어요. 이제 곧 무지개가 뜰 것 같거든요.
사라져버릴 것들에 대한 기대를 갖기로 했다. 사라지는 것은 시간 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었으니까. 지금만 있는 이 자리에서는 영원만이 있음을 너와 나는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은 사랑이야. 아주 영원한 사랑 말이야.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것은 사랑이야. 사랑이 아닌 것들은 전부 의미 없는 것들이야.
사라져버린 지난 사랑은 영원히 내 안에 남아있는 것이었다. 나는 아쉬움이나 후회보다는 애틋함을 배웠다. 애틋하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을. 너는 여전히 무지개를 향해 걷고 있었고 나는 선율을 따라 눈을 감았다. 이제는 점점 멀어질 시간이야. 벌어진 거리만큼이나 애틋함은 길어지고 있다.
너는 투명하고 뭉그러지기 쉬운 사람. 너는 그러나 사라지지 않는 사람. 건반 위로 봄비가 내렸다. 작은 방울들이 진한 울림을 남겼다. 울림은 둥글었다. 둥근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너의 마음, 나의 마음, 기억, 사랑, 추억, 삶, 그 모든 것들이 둥글었다. 둥글지 않은 것은 세상뿐이었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웃음소리. 결국 마지막에는 우리 모두 둥글게 웃을 거야. 꺾이지도 포기하지도 미워하지도 말자. 보고 싶은 마음을 삼키고 웃음을 보이자. 꾹꾹 눌러 담은 발자국에는 그 모든 다짐이 담겨 있었다. 느린 걸음, 걸음마다 의미가 담겨 있었다. 묵직한 너를 떠올린다. 나는 너를 안는다. 내 팔에 다 감기지 않는 너를 있는 힘껏 안는다. 볼 수 없는 네 표정을 나는 상상해본다. 아마도 너는 둥근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덩달아 동그라미가 된다. 잠들기 전마다 널 상상해. 그리워하기도 하고 추억하기도 하지. 때로는 눈물이 흐르기도 해.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중요한 건 너는 내게 사랑이라는 거야. 너는 내게 동그라미고 사랑이고 빗방울이야. 물얼룩처럼 남겨진 너의 흔적을 보며 나는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