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덴 순서 없습니다
나를 키워줄 마음이 없어 보이는 회사를 위해 몸이 썩어가는 것 같은 노동강도를 견딜 마음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더 이상 재계약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파트장은 내게 '같이 좀만 더 해보자. 선생님이 우리 부서에 큰 힘이 된다.'라는 말 대신 협박 비슷하게 들릴만한 말을 할 뿐이었다. '선생님 그만두면, 우리 인원 마이너스로 가야 하는 건데 그럼 너무 힘들거든요. 그래도 재계약 안 할 건가요? 아무튼 우리도 대책을 세워야 하니까 지금 당장 결정해줄래요?' 맙소사. 전화통화로 재계약을 논의하는 파트장이라니. 존중받는 느낌은 조금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통화를 끊고서는 기분이 너무 더러웠다.
그 뒤로 파트장은 내가 없는 회의에서 병원 사람들에게 나의 퇴사 소식을 띄웠다. 나에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남아있던 미련까지 깔끔하게 씻겨 내려갔다.
입사 후 처음으로 의지하고 따랐던 선생님과 퇴사 소식을 전할 겸 점심을 같이 했다. 무슨 일이 해보고 싶어서 나가는 거냐고 물으시는데, 선생님은 어찌 되었든 병원에 남는 사람이고, 나는 떠나는 사람인데 어디까지 솔직해져야 하나 고민했다. 솔직하고 싶었다.
'반복되는 바쁜 업무 속에서 조제랑 감사만 하다 보니까 점점 약을 모르게 되는 것 같아요. 직접 복약지도랑 투약을 하고 싶어요 선생님. 머릿속에 쌓여가는 게 있으면 좋겠어요.'
핑계다, 공부는 직접 스스로 하는 거다 라고 할 줄 알 있던 선생님이 잠깐 내 얘기를 듣고 생각하시더니.
'사실 너 말이 맞다. 치여서 업무만 하다 보면 쉽지 않지. 하루하루 시간만 가고.'
나랑 선생님의 나이차가 대충 20년 정도 될 텐데, 허물없이 대해 주시고 후배가 아니라 동료로 생각해주시고. 내가 선생님을 좋아하고 따랐던 건 선생님의 이런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지. 병원을 그만두면 결국 사람이 그리워질 것 같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벌써 그리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