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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트라슈 Jul 19. 2020

같이 걸은 길이 얼마나 될까






너와의 첫 만남은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대학원에 갓 입학한 신입생이었고,

너는 이미 한국에서 4년 넘게 살고 있던 외국인 박사과정생이었다.

한국어뿐만 아니라, 네 개의 유럽계 언어와 영어까지 능통한 너.

큰 키와 이상적인 골격, 잘생긴 얼굴까지 모든 여자 선배, 동기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가

나한테 사귀자고 했을 때, 나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세미나까지 두 시간 정도의 공강 시간이 있었고,

우리는 그 시간마다 학교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새벽 산행을 나갔다가 목을 맨 등산객이 시신이 발견된 이후로 통행이 금지된 산길도 오르고,

학생들의 발길도 닫지 않는 사찰로 향하는 길도 갔다.


그 사찰에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오래 방치된 탓인지 팔뚝만 한 잉어가 아주 느릿느릿하고 천천히 헤엄을 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는 나한테 네가 불쑥 내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정말 예쁘다'라고 내뱉은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나는 늘 다이어트를 계획했고, 일시적인 성공과 그보다 많은 실패를 반복했다.

아무리 살을 빼도 얇아지지 않는 기본 골격은 늘 불만이었고,

쌍꺼풀 없는 눈에 대한 자신감 따위 제로였는데,

얘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걸까, 싶어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번은 그런 날도 있었다.

술은 입에도 안 대는 네가 오랫동안 술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지만 이미 나는 취한 상태였고 어느 순간 너의 안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막차를 타기 위해 전철역에 도착했을 때, 네가 의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오냐고, 이게 정말 막차라고, 이걸 못 타면 너는 집에 못 가고 그럼 큰일 날 거야.

우리는 있는 힘껏 달려 지하철 문이 닫히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숨을 몰아쉬었다.


가는 길에 일찍 죽고 싶었지만, 너무 오래 살아서 예술을 하게 된 예술가의 이야기를하다가,

내가  "음 1900년 초면 그러니까 한국의 고전 같은건가"라는 혼잣말을 했다.

너는 "1910년대가 고전이라고? 우리한테 고전은 단테야"라고 말해서 우리는 5개 역이 지나도록 웃었다.



너에 대한 기억 대부분은 이렇게 말도 못하게 진부하지만 청춘영화의 한 장면처럼 오래 남아있다.  





네가 세 번째 고백을 했을 때, 나는 '나중을 생각하면 너무 걱정된다'라는 말로 거절했다.


전철은 타러 가는 내내 너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어색한 분위기를 쇄신해보겠답시고 "괜찮지?"라고 물었다.


그 말을 뱉으면서도 아차 싶었다. 괜찮느냐니, 도대체 뭐가 괜찮으냐는 거지? 너의 마음이 괜찮으냐는 게 아니라, 이건 내 맘이 편하고 싶어서 확인하는 말이라는 것을 뱉고 난 뒤에 알았다.

그러니까 마치 무슨 시혜를 베푸는 듯한 나의 말투에 스스로도 적지 않게 당황했다.



너는 처음으로 불같이 화를 냈다.

"내가? 너가? 우리가? 뭐가 괜찮냐고 물어보는 거야?"

그렇게 큰 소리를 내는 너를 두고 나는 다른 길로 돌아서 집에 왔다.

우리는 그 후로 일 년 가까이 서로를 피해 다녔다.

학교에는 금세 소문이 났다. 만났던 거 맞다니까, 헤어진 게 분명하다. 둘이 수상하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나는 너를 사귄 적이 없으니 우린 헤어진 적도 없다.

그게 팩고 전부라고 생각했지만, 남들 눈에는 전부가 아닌 것들이 보이나 보다. 



시간이 지나서 너는 이제 정말 나에 대한 감정이 전혀 없다고 찾아왔다.

우리는 옛날로 돌아가서 같이 공원을 걷고, 낮은 산을 오르고, 차를 마셨다.  


그리고 작년 가을 우리는 제주도 여행을 가기로 약속했다.

너는 게스트 하우스에 묶고 한라산을 오르겠다고, 나는 산이 싫으니 오름을 오래오래 걷겠다고 했다,

나는 숨겨놓은 작은 박물관을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너는 처음 가는 제주도가 나와 함께 간다는 게 정말 기쁘다며,

디데이를 세면서 두 달 정도 고국을 다녀왔다.



너가 잠깐 한국을 떠난 사이, 나는 많은 일을 겪었다.

내 유년을 함께 보낸 할머니를 잃었고,

할머니를 추억하는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사람한테 지쳤고, 시달렸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 나한테 다리 하나가 부러진 의자처럼 기대는지 모르겠다고 진절머리가 난다고

상담 선생님을 붙잡고 매주 울고, 사람들을 미워하는 사이 가을이 가고 겨울이 지나, 봄이 왔다.


우리의 약속은 빈말이 되었고,

나는 나대로 너에게 미안함이,

너는 너대로 나한테 서운함이 쌓여있었다.



다음 해 봄, 너한테 연락이 왔다.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내가 너무 바쁜 거 같아서 조금 더 빨리 연락하고 싶었는데, 연락할 수 없었다고.

돌아가기 전에 나를 꼭 보고 싶은데 시간이 촉박하다고

나는 반나절을 고민했지만 결과적으로  리는 다시 만났다


그날이 마지막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당시 우리는 다시 만났다


나한테는 육 년을 알았던 네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그건 정말 아주 극히 너라는 사람의 일부였다는 것을 확인한 날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살면서 처음으로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봤다고, 뭐를 골라야 할지 몰라서 다 사 왔다며

맥주 캔을 사이즈 별로 내밀어서 '한국에 헛살았네'하고 나는 한참을 웃었다.

6년을 만나면서 처음으로 같이 밥을 먹었다는 너의 말에, 나는 우리의 지난 시간을 복귀하기도 했다.



우리는 헤어졌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되면 다시 만날 사람처럼 헤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네가 키우던 작은 화분 하나를 들고 왔다.

고국으로 가져갈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애물단지를 내가 들고 온 셈이다.

도통 너희 집에서 안 자라고 말라가는 화분이 우리 집에 오자,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금방 잎이 푸르스름지고 키가 컸다.




딱히 노력하지 않았다. 어떤 정성을 들이지 않고

가끔 생각나면 물을 주고, 해를 보여줬을 뿐이데, 알아서 잘 자랐다.  

나는 오늘도 너에게 사진을 보내면서 '너의 손을 정말 똥손이야'라고 놀렸다.


어쩐지 그게 지난 시간 별다른 노력 없이 이어졌던 우리 사이 어떤 우정 같기도 하고,

그렇다는 말을 이어갔고, 너 일부 동의했다.






우리가 함께 걸은 길이, 시간이 얼마나 될까.

모르긴 몰라도 아마 서울에서 강릉을 걸어서 왕복할 수 있는 거리와 시간 정도는 나오겠지.


너는 나한테 자주 편지를 쓰고 , 치즈를 만들어 주었다.

올리브가 박힌 치즈, 리코타 치즈, 대마유가 들어간 치즈를 만들어 주었고,

내가 자체 휴강을 한 다음 날이면 수업 시간 내 집중하지 못하고 문만 쳐다봤다는 푸념과 함께

그때 쓴 쪽지를 가방에 넣어주기도 했다.


사실 우리는 친구라고 하기에는 가깝고, 연인이라고 하기에는 히 먼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건 순전히 나의 의지였고 너의 태도였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친구인데 왜 그러지?', '헤어지면 앞으로 단체 생활 어떻게 해?', '불편해지면 어떡하지?'

등등의 이유를 들어서 거절하고, 우리는 '허울 좋은 친구'로 남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관계를 꽤 잘 유지해왔다.




그러니까 한 달에 한두 번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오가는 길에 만나서 차를 마시고, 꽃구경을 하고 정릉을 산책했을 뿐이다,라고 하면 거짓말이다.

6년 동안 가장 가깝고도 먼 사이였다.


지나서 생각해보면  이건 순전히

도통 사람한테 곁을 안 주는 차가운 기질의 너와,

사람한테 쉽게 마음을 못 여는, 겁 많은 내가 만나서,

(가까운 친구라고는 오직 서로 뿐이라서)


 6년을 한결같이 지낼 수 있었던 거 같다.

다른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다.



너는 오늘도 나에게, 이제는 내가 한국에서 보지 못할(?) 깨끗한 하늘과 네가 산책한 곳의 사진을 전송해왔다.





'네가 다른 사람의 시선보다 너의 마음을 잘 돌보길 되길 바란다'는 말과 함께-


그리고 가끔 나보다 더 정확하게 나의 상황을 짚어내는 너때문에 종종 놀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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