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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이나모 Jul 13. 2024

아빠는 유감이라고 하셨지

공대 아름이 엔지니어 되다

내가 화공과를 간 건 순전히 남자 때문이었다.


여중 여고를 졸업하고, 특별할 것 없는 수능성적을 받고 나니

해야 할 건 점수에 맞는 학교, 전공을 고르는 것이었다.


참으로 어렵게 찾아낸 몇 개의 서울 중위권 대학 두 개에서 마지막으로 합격 통보를 받았다.

컴퓨터 공학과, 화학공학과.


평생 전기 엔지니어로 사셨던 아버지는 강력하게 컴퓨터 공학과를 추천했다.

현장에서 일하지 않아도 되는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전공이라고 생각하셨겠지,


나는 화학공학과를 선택했다. 컴공과 학교는 여학교였기 때문이었다.

여중, 여고를 졸업하고 여대까지 가야 한다니, 4년 내내 여대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남자 때문에 그렇게 나는 화학공학과 공대 아름이가 되었다.


다른 공대와는 다르게 화공 생공 (생명공학과)는 여자들의 비율이 40% 정도로 높은 편이다.

공대 아름이란 말을 사용하기 애매한 우리 과였지만 그래도 공대는 공대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수업을 듣고, 맞는 답인지 알지 못하는 시험들을 무수히 쳐내고

그렇게 어찌어찌 졸업을 하게 되었다.


내가 졸업했던 2012년 그때는 한국엔지니어링 업계가 호황이었다.

대기업 연봉 순위 상위권을 차지하는 것은 모두 엔지니어링 회사들이었다.


취업시즌이 되니 자연스럽게 나의 공대 타이틀이면 지원할 수 있는 연봉 높은 대기업이 눈에 들어왔다.

엔지니어링 회사들이었다.

그때엔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높은 연봉과 해외 출장과 같은 단어에 홀려 그렇게도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다.


운이 좋았던 나는 대기업 엔지니어링 회사에 입사를 하게 되었다.

지금은 더 어렵지만, 그 당시에도 취업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어서 부모님은 좋아하셨다.

대기업들이 으레 그렇듯, 입사 전 집으로 입사 축하 카드며 와인을 보내주었다.

그 카드와 와인을 받은 아빠는 한참을 회사 이름이 적힌 카드를 보시고는 한 말씀하셨다.


‘딸아, 네가 엔지니어가 된다니 참 유감이긴 하다.’


그 당시 50대 후반이었던 아빠는 평생을 전기 엔지니어로 건설회사에서 근무하셨다.

솔직히 말하면 아빠의 회사생활이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다.

어떤 때의 아빠는 화가 많았고, 어떤 때의 아빠는 어깨가 축 처져있었다.

주말저녁이 되면 다음 주를 걱정하는 아빠의 모습은 행복한 직장인과는 거리가 있었다.

사회생활이 다 그런 거냐고 하기엔 역시 평생 사회생활을 하셨던 엄마에게선 업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막 회사에 발을 디딘 신입사원이 무얼 알았겠는가?

‘건설’과 ‘엔지니어링‘은 다르다고, ‘우리 회사’는 다를 거라며 그렇게 나의 열정 넘치는 엔지니어로써의 커리어가 시작되었다.



2013년부터 시작될 긴 업계 불황도 알지 못하고,

3년 뒤 엔지니어 하기 싫다고 펑펑 울게 될 나의 미래도 모르고,

그렇게 회사로 처음 출근하는 나의 마음은 설렘으로 두근두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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