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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연 Mar 03. 2024

배부른 투정, 배고픈 투정

나는 종종 병원에 가는 대신 약국에 들락거리기를 고집한다.



약국에 가는 걸 좋아한다. 네모난 알약 통이 수만 개 나란히 진열되어 있는 단정한 분위기가 마음을 단정하게 만들어준다. 도서관 열람실 책꽂이에 꽂혀있는 수많은 책들에게서 받는 안정감이랑 비슷한 것도 같다. 모든 쓸모 있는 것들의 집합체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 처방전을 내밀고 약이 제조되기를 기다리며 약국 안을 둘러보는 몇 분의 시간도 재밌다. 내가 나를 잘 돌보기 위한 일 같아서 그렇다.


약국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약사 선생님께 나의 증상에 관해 구구절절 설명할 수 있어서다. 적당한 엄살로 여기가 욱신 거린다, 다래끼가 난 것 같은데 수술은 하기 싫다, 봄이라 비염이 심해진 것 같다는 둥 처음 보는 상대임에도 언제든 병에 관해 가벼운 온도의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정당한 상대라고 생각되어서다. 약사 선생님의 노련한 공감 스킬과 약 처방으로 적당한 위로도 받고 마음도 이완시키고 나온다. 그는 처방전 없이는 내가 가진 병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겠지만 작은 알약 몇 알로 일시적으로 나를 안심시켜 줄 수 있다. 내 증상에 공감은 해주되 너무 심각해지지 않는 타인인 점도 좋다. 전국 약사 선생님들께선 나 같은 환자 때문에 고충을 겪고 계실 수도 있지만, 나는 내 증상을 뛰어넘는 어리광이 허용되는(그렇다고 믿는) 약국이 좋다.


주변에선 아프면 병원부터 가야 한다고 입이 닳도록 얘기하지만 내게 병원은 선택 옵션이다. 병원은 관문이 많기 때문이다. 병명을 알기 위해 병원의 운영 시간을 확인하고 내가 병원에 들를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첫 번째 관문. 병원에 도착하면 대기의 관문이 시작된다. 대기 환자들과 의자에 앉아 이름이 호명되기를 꼼짝없이 기다리는 두 번째 관문. 대기 시간은 늘 예측할 수 없다. 이름이 금방 호명될 때도 있지만 어쩔 땐 한 시간씩이나 할 일 없이 앉아있어야 한다. 진료를 받기 위해 확보해야 하는 시간의 범위는 들쑥날쑥하다. 업무 시간을 쪼개 병원에 가야 하는 일은 작은 모험을 동반한다.


선생님께선 대개 별일 아니라는 듯, 약 잘 챙겨 먹고 잠 잘 주무시라는 조언을 끝으로 나를 돌려보낸다. 그것은 두말없이 좋은 일이지만 안심하는 동시에 허무함이 밀려온다. 대기실에서 한 시간이나 기다렸는데! 배부른 투정이 따로 없다. 그런가 하면 구체적으로 나의 상태를 점검받는 날도 있다. 원인 모를 염증으로 계획에도 없던 초음파나 엑스레이 검사까지 이어지는 날엔 몸과 마음이 더욱 긴장한다. 그저 약 잘 먹고 잠 잘 자라는 조언이 그리워진다. 그럼에도 검사를 받기 위해 환복을 하고 있자니 별일 아니기를 바라는 동시에 환복까지 하는데 그것에 상응하는(?) 별일이라도 생겨야 합당한 건지 따져보기도 한다. 물론 그 병이 무엇인지는 상상하기도 싫다.


병원으로 향하는 순간부터 병원을 나서는 순간까지 내 수많은 자아는 아무도 시키지 않은 희로애락을 겪는다. 차트를 보며 뜸 들이거나 인상을 찌푸리는 선생님의 입에서 큰 병명이 거론될 것 같은 때도 있다. 병원은 이완을 쉽게 허락해 주지 않는다. 약사 선생님 앞에서 잘만 나타나던 어리광 자아는 병원에서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다. 내 몸을 설명하는 객관적인 차트가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병원 안에서의 관문을 통과할 동안 단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더 무서운 건, 경과를 두고 보자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다. 약 처방 후에도 증상이 그대로면 더 큰 병원에 가봐야 한다는 공포의 당부. 그런 날은 병원 문을 나서기도 전에 이미 대학 병원 입원실에 누워 있는 나를 그리느라 분주하다.


어떤 마음으로 병원을 나서던 늘 약국이 짝꿍처럼 붙어 있는 점이 나를 안심하게 한다. 나는 처방전에 쓰여 있는 약 성분에 관해선 하나도 모르지만 그 전문적인 종이를 약사 선생님께 당당하게 제출한다. 내 이름이 적힌 약 봉투를 품 안에 넣고 약국을 나서면 병원을 나설 때와는 다른 든든함이 발걸음을 가볍게 만든다.


누군가는 제약회사와 약국의 마케팅을 수상하다고 말하며 약국에만 의존하는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낫지 않냐며, 명쾌한 답을 주는 병원에 가는 게 뭐가 어렵냐고 꾸짖는다. 하지만 삼십 대인 지금도 병원과의 도무지 좁힐 수 없는 간격을 두고 나만의 신경전이 이어지고 있다. 이 고집 때문에 종종 주변인들이 고생한다. 염증 때문에 밤에 잠도 못 자면서 수술이 무서워 병원 가기를 미루는 내 등을 병원으로 떠밀던 동료들은, 내가 병원에서 진료받지 않고 나올까 봐 업무 시간 땡땡이를 감수했다. 얼마 전엔 임파선 부은 게 약국으로 해결되겠냐며 약사 선생님께 병원부터 데려가겠다고 나를 병원으로 연행(?)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렇게 떠밀려 병원에 다녀오고 나면 당연히 통증은 사라지고 그들에게 칭찬도 받는다. 고작 병원 하나 때문에 이토록 요란스러워야 하는가 싶지만 칭찬을 받고 나면 나도 모르게 유치한 걸 알면서도 계속 꾸중을 듣고 싶어 진다. 내게 나무라는 사람들에게 등 떠밀려 병원에 가고 싶어 진다. 통증을 해결하기 위해 주변에 완충제가 되어줄 친구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꾸중을 듣기 위해 내일도 약국을 좋아한다고 광고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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