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기차를 타고 내려가는 길에 보이는 풍경이 아주 기묘했다. 이 날은 미세먼지가 아주 많다고 했다. 여기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울이야. 갑자기 세계가 멸망한다던가, 전쟁이 터진다던가, 좀비가 출현하거나, 전염병이 창궐하거나, 빙하기가 재림하거나, 내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막상 그렇게 된다고 한다면 세계가 멸망할 때 무엇을 해야 할까.
어느 날은 잘 알지 못하고 미리 헤어진 관계들에 대해 생각했다.
끝나버렸다거나 잃어버렸다고 말하기에는 애초에 제대로 가진 적도 없던 관계. 어느 한 순간에는 눈빛이 진득하게 진심이었다가도 너무 쉽게 의미를 잃었던, 내가 껍질만을 쓰다듬어본, 수많은 겉들에 대해서. 내가 주지 않았던 곁들에 대해서. 어쩌면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결들에 대해서.
그러니까 그 겉와 곁과 결들에 대해서,
상상하고 또 잊어버리곤 했다.
가끔은 어떤 순간들이 떠올랐다. 은행나무 잎이 한없이 떨어져내리던 노란 홍릉길, 주머니에 품고 왔다던 뜨거운 캔커피, 해가 뜨기 직전의 새파란 새벽, 화를 내다가도 슬쩍 어설퍼지는 입매, 인파 속에서 길게 이어지던 침묵, 처음 손을 잡으려고 주먹을 쥐었다 펴고, 그걸 또 모른 척하고 속으로 웃었던 것, 처음으로 내 앞에서 담배를 피던 순간, 주머니 안에서 차갑게 감각을 잃어가던 손 끝, 처음으로 혼자 술을 마셨던 날, 전화를 끊고 혼자 나선 산책, 감기에 걸려 죽을 듯이 아프던 날, 친구가 전해온 소식을 듣고 떨지 않기 위해 꽉 쥐었던 머그컵의 단단한 촉감. 애정은 깊고 진한 흔적을 남긴다.
어느 날은 여러 명이서 술을 마시다가 한 친구가 갑자기 물었다. 사랑 때문에 울어본 적 있어? 속으로 대답했다. 수도 없이 그랬지.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를 최선의 미래에 대한 상상-손의 감촉이나 품의 온기,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설레고 다정한 순간,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에 대한 배움과 감탄과 존경, 끝없는 애정을 바탕으로 한 온전한 이해와 견고한 유대, 운명에 대한 확신, 기꺼운 희생, 주고 받는 감정과 영감, 그로인해 높게 솟아오르는 고양감 같은 것-을 했다. 나는 늘 최선에 대해, 그리고 최악에 대해 상상하고 마지막에는 최악을 대비하는 편을 선택했다. 그건 세태에 맞는 현명한 처신이라 여기지만 그렇게 미리 잃어버린 최선이 분명 있었을거다.
하지만 감정으로 최선을 고르기에는 맞닿은 최악이 너무 최악이니까. 애정을 받아본 기억은 다정이 짙고, 분명 심심하거나 외로운 순간들이 있고, 요즘은 사람들이 연애를 참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알기는 하는데. 여전히 참 무서워.
최근에만 성남 어린이집 사건, 여성 연예인들의 연이은 사망 소식, EBS의 청소년 폭행과 성희롱, 남성 연예인들의 강간, 버닝썬 사태, 데이트 폭력과 불법 촬영 문제는 너무나 흔해졌고, 연인 관계에서의 살인도 빈번하다. 나 역시 이상한 메세지를 받거나, 길거리에서 불쾌한 일을 겪거나, 손목을 잡고 억지로 당기거나, 귀가를 막거나, 몸을 억압하려는 시도는 비일비재했고, 과거 연애사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러니 겉과 곁과 결이야 어쨌든 현실은 너무 현실이다. 이 세상은 아포칼립스 세계관이지만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으니, 날 보호해줄 것은 나의 최선에 대한 로맨틱한 상상이 아니라 나의 예민함과 준비성과 예리한 촉이다. 여기가 아포칼립스 세계관이라면 뭐든 미리 대비해서 나쁠 건 없지.
그래도 한 번은 미리 잃어버린 것을 우연히 마주치는 상상을 했다. 알아볼 수나 있을까. 아는 척을 할까. 도망칠까. 인사는 할까. 어색할까, 화를 낼까, 아니면 친숙할까. 나는 걸을 때 주변을 살피지 않는 사람이니까 스치더라도 아마 먼저 알아챌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말을 걸어온다면, 이야기를 한다면. 뭐라고 할까, 할 말이 있을까.
고등학생 때 담임 선생님은 입버릇처럼 기회비용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우리가 무언가 하나를 선택하면 나머지는 포기해야 하는 법이고 포기한 것들 중 가장 큰 것이 기회비용이라고. 그러니 후회하고 싶지 않으면 멀리 길게 보고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라고 하셨다. 이 말이야 매번 뺀질뺀질하게 농땡이를 치던 나에게 대입과 수능 준비에 올인하라고 하신 말씀이었고, 당시에는 이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선생님의 마음을 알겠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울에서 우리는 살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갑자기 세계가 멸망한다던가, 전쟁이 터진다던가, 좀비가 출현한다거나, 전염병이 창궐하거나, 빙하기가 재림한다던가, 내가 죽는다던가 하는 상상을 하면서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러면 조언이 하고 싶어질 거다. 선생님은 한참 전부터 이미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울에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모든 선택에는 기회비용이 따른다. 그것이 금전이든, 시간이든, 감정이든, 능력이든, 사람이든 간에 선택은 필연적으로 얻는 것과 잃는 것을 가른다. 그런데 생존을 사랑의 기회비용으로 쓸 순 없는걸. 이제 나는 더 깊고 넓게 알게 되었고, 더 조심스러워졌다.
어린 나는 똑똑하고 올곧았지만 순수한 만큼 편협했고, 모르는 만큼 잔인했다. 올바르고 일관적이고 싶었고 입장을 바꾸고 싶지 않은 자존심과 오기도 있었다. 만남 또는 헤어짐만 존재하는 관계관 안에서는 그 사이의 무수한 예외들은 있어도 없는 것이었으니까. 내가 가진 항목 외의 것들은 도무지 이해도 안 되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존재하지만 내가 무시해왔던 그 미묘하고 숱한 것들에 대해 요즘은 다시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사람이 어떻게 그래, 에서부터 그냥, 그런 사람들도 있다는 걸 이제는 인정하게 되었다. 그냥 나와는 다른 사람도 있는 거지.
인정하고 나니 구분이 되었다. 서로의 차이가 더 선명해졌다. 그냥 그런 사람들이 있고, 나와는 참 다르다. 그래서 문득 궁금해졌다. 왜 이렇게 다를까. 무엇 때문일까. 역시 잘 알지 못하고 헤어졌다는 생각을 다시 했다.
아무렴 어때, 어찌 되었든 현실이 디스토피아,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가 되어버렸으니까.
세계가 멸망하기 전에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몇 있다. 어떤 사람들은 모아서 서로의 이른 장례를 치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세계가 멸명하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을 해야지. 세계가 멸망하기 전에 정리할 것을 정리하고. 곧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