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0.01.14.

by 비차

잘 지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든 게 아주 오랜만이었다.


손가락을 부러뜨리던 기억들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나는 부러진 손가락으로도 사는 법을 배웠다. 차마 말 하지 못했던 고되고 거친 일상의 몇몇 습관들과 그걸 설명하고 싶지 않던 내가 많은 것을 정리했다. 되돌아보고 곱씹고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이제서야, 내가 많은 것을 극복했고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귀한 것은 반짝이고 아름다워 동경받는 것이 아니라 어렵고 복잡하고 섬세해서 대단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당연한 듯 그 자리에 있어 나를 숨쉬게 하고 먹이고 재워주는 것이다. 새벽에 떡볶이를 먹고 커피 한 잔을 사서 들어오는 일이다. 산책을 하며 숨을 크게 쉬어보는 일이다. 오락실을 같이 가고 열 번은 반복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스워 깔깔 웃는 일이다. 열일곱 살에 선물받은 머그컵에 다시 핫초코를 타는 일이다.


작년의 코엑스에서는 숨이 계속 막혔다. 숨을 참고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숨어들어가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있어야 했다. 손 끝이 차갑고 떨렸다. 어제는 잠실에서 미팅을 하고 퇴근길의 지하철에 타서 집으로 오면서도 숨이 막히거나 어지럽지 않았다. 어깨나 무릎을 닿아오는 사람이 밉지 않았다. 그게 정말이지 생소했다. 잘 모르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흥미로웠다. 일을 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집중하고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에 뿌듯함을 느꼈고 외주와 전시 제안을 받아 바삐 움직였다.


일요일에는 잠을 아주 깊고 달게 오래 잤다. 간장게장을 몇 주간 먹고 싶다 노래를 부르다가 양껏 먹었다. 같이 먹자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침대에 하루 종일을 누워 있어도 힘들어서 잠을 자는 중에도 더 깊게 잠들고 싶은 때가 있었다. 그러고도 제대로 잔다고 보기가 어려웠다. 수면의 아래로 해저에 닿을 때까지 가라앉고 싶었다. 무기력이 너무 심해서 일어나는 것이 너무 힘들고 냉장고까지 걷는 것도 너무 멀게 느껴져서 물도 마시지 않고 지냈다. 몸이 겨울 나뭇가지처럼 마르고 입 안이 건조한 날이었다.


며칠 전에 일어나서 씻고 세탁기를 돌리고 쓰레기를 버리고 편의점에서 우유를 사서 돌아와 작업을 하러 앉았다. 자주 연락하는 친구가 뭘 하느냐 해서 쭈욱 설명했다. 친구가 이 말을 해주었다. "이제는 정말 많이 나아진 것 같아. 너무 기특해." 그 말을 들으니 사는 게 그렇게 힘들지 않아졌다. 어느새 다시 그렇게 되었다.


새삼스럽게, 그 전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도 깨달았다.


무너지지 않고 사는 삶을 살고 싶었지만, 무너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삶이 더 가치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수도 없이 무너져도 나는 다시 일어날거고 삶은 이어진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 애정어린 말, 끝없이 이어지던 위로가 있었다. 어떻게 사는지 결정하는 것은 결국 나였고, 아직 나는 진심으로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지는 못하지만, 나를 잘 살게 하고 싶다.


사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지만
잘 지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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