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일기
[제주일기]
2017. 08. 24 - 27.
17. 애월낙조
서귀포방의 월세를 낼 때가 왔다. 뚜벅이로 다니기에는 편한 위치였지만 제주에서 기대한 생활은 아니었다. 어떻게 할지 아무 것도 정하지 못했는데 날짜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모슬포 항에서 봤던 낙조가 떠올랐다. 서쪽으로 옮기기로 했다.
협재는 사람이 너무 많고 금능에는 마땅한 곳이 없고 이호테우는 비행기가 시끄러워 싫다. 결국 애월읍에 있는 곽지과물에 자리를 잡았다. 각 해변마다 특징이 다른데 이곳에는 용천탕이 있었다. 바닷가에서 솟아오르는 차가운 민물로 야외 목욕탕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예전에는 해녀 분들 전용 욕탕이었을 곳이 관광객들이 체험해 볼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거친 바다가 아니라고 들었는데 수심도 깊고 파도도 높았다. 밖에서 볼 때는 맑았는데 안에 들어와 보니 뿌옜다. 파도에 모래가 뒤집어진걸까. 바다에 누워 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실컷 놀고 해변으로 나오는데 바다 가장자리가 해초로 뒤덮여있었다. 들어갈 때는 없었던 것 같은데 어디서 몰려든걸까. 미역국이네. 바다에 들어오던 사람들이 물놀이를 포기하고 밖으로 돌아나갔다.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괜찮은데. 지난봄에는 중국에서 밀려온 괭생이모자반이 문제였다던데 기후변화의 몸살은 이제 시작인 것 같았다.
해수욕 후에 올레 15코스를 걸었다. 바닷가에 있는 근사한 와인바가 나타났다. 비싸보였지만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취향저격의 재즈음악과 ‘제주밀맥주’! 그토록 마셔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만났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먹고 마셨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였으면 좋았을 텐데. 낯선 감정이다. ‘로멘틱’을 꾸며 놓은 장소의 힘이겠지. 해가 구름 뒤로 숨어 제대로 된 낙조를 보지 못했다. 밤바다를 산책했다.
8월이 끝나가고 있었다. 아직 제주를 알려면 멀었는데 돈을 벌어야 한다는 초조함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여기서 일을 시작해도 되는데 몸이 안 움직인다. 나도 내 자신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
제주에서의 마지막 밤. 구름 한 점 없는 깨끗한 수평선이 보였다. 오늘은 멋진 낙조를 볼 수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강렬한 주황색의 동그란 태양이 수평선 위로 눈부신 그림자를 드리웠다. 하늘과 구름에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주황색, 연하늘색, 보라색, 빨간색, 분홍색... 시시각각 황홀한 색깔로 물들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멈춰서 넋을 잃고 지는 해를 바라봤다. 태양의 속도가 이리도 빨랐는지. 태양이 수평선에 맞닿더니 바다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해를 이렇게 오래 바라보고 있는 것이 처음이었다. 이 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제발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순식간에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어둠이 몰려왔다. 변화무쌍한 하늘이 컴컴해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어린왕자가 생각났다. 의자를 앞으로 당기면 해가 지는 것을 계속 볼 수 있는 작은 행성. 어린왕자는 슬퍼서 그랬다고 했는데 나는 왜 이러는 것일까. 아직 부족하다. 바다에 가로막혀 따라갈 수 없는 낙조. 태양의 잔상이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눈이 빽빽하고 시야가 흐려지는 현상이 삼사일 지속됐다. 인간이 태양을 흠모하면 어떻게 되는지 몸소 알려주겠다는 듯이. 싸늘한 바람과 또르르 굴러가는 풀벌레 소리. 여름이 가버렸다.
2017. 08. 24 - 27.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