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창민 Dec 19. 2017

설득하는 글 쓰는 방법

우리는 설득할 수 있을 만큼 상대를 충분히 알고 있을까?


대학생 때 글쓰기 스터디를 좀 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글은 안쓰고, 2주를 1세트로 묶어 1) 글감 주제에 대한 토론, 2) 써온 글에 대한 1:多 피드백을 진행했다. 글은 토론 후 집 가서 혼자 썼다.


스터디 초창기는 일부러 찬성과 반대로 갈리는 주제 위주로 선정했다. 찬반으로 갈릴수록 토론이 활발해지고 좋은 글감도 많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주제는 영화 그녀(Her) 감상 후 인간과 기계가 사랑할 수 있을지에 대한 찬반토론이었다. 영화도 재밌고 주제도 재밌어서 토론도 조오오온나 재밌었다.


모두 잔뜩 신이 나서 토론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와 의견을 주고 받는 게 이렇게 재밌다. 얼마 전 충돌에 대해 쓴 글처럼 내일도 없고 친구도 없고 영원히 혼자 눈물 젖은 학식 라면을 먹어도 괜찮고 내 꿈은 오직 너를 논리로 짖밟겠다는 것인 마냥 핏대 톤으로 토론했다. 이 방식이 지속가능한 성공적인 시스템인 줄 알았다.



스터디를 이어갈수록 문제가 보였다. 주장이 서로 첨예한 토론일수록 반대 진영과의 소통은 단절되고 같은 진영끼리 돈독해질 뿐인 것이다. "이런 점은 이래서 잘못됐으니 우리 주장을 따라야 한다!!"는 분명 ‘설득의 문체’였지만 같은 편의 결속력을 다지는 효과만 있었다. 양쪽 다 상대방은 토론할 마음은 없고 그저 너희는 어쨌든 다 틀렸다고 말할 뿐이라는 생각으로 뚱해졌다. 끝에는 설득은 커녕 서로를 외면하고 싶었다. 나와 반대되는 생각이 없는 세상은 어쩌면 천국이니까.


이 문제는 글에도 똑같이 묻어났다. 모두의 글은 지나치게 감정적이거나 첫머리부터 너희는 다 틀렸다는 결론을 지어놓고 시작했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사이다 글이었지만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눈쌀을 찌푸렸다. 설득은 너의 생각을 바꾸는 게 궁극적인 목표인데, 우리의 글은 나의 편을 결속시키는 깃발일 뿐이었다. 결국 우리는 누구도 설득하지 못하는 글로 자의식만 살찌웠다. 내가 제일 심했다.



토론 성격을 바꿔봤다. 공공의 적을 만든 거다. 대통령, 정부, 국회의원, 총장, 교수, 대기업, 매스미디어 등등. 이들에 대한 토론을 하면 죄다 빨갱이만 모였는지 기득권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만은 같아서 세부적인 부분만 논의하면 됐다. 토론은 이전보다 건강해보였다. 너도맞고 나도맞고 쿵짝쿵짝 하하호호.


이상하게도 글은 여전히 문제였다. 일단 대체 누구를 설득하고 싶은 글인지 안보였다. 기득권인지, 기득권을 따르는 자들인지, 그냥 아무 생각도 없는 자들인지 대상이 모호한 글이었다. 정확히 말해서는 저중에 누구도 설득되지 않을 듯한 글이었다. 고작 대학생이 만사에 통달한 전문가인양 가르치는듯한 어조로 글을 쓴 것이다.


이를 테면 이렇다. “이봐 국회의원 양반, 내가 좀 아는데 당신이 낸 정책은 틀려먹었어~ 좀 더 국민을 생각한 정치 활동을 해야지~~ 돈과 권력에 눈이 멀어선 안돼~!!” 실제로 위처럼 글을 쓰지는 않았지만 모든 활자에서 마치 저렇게 말하고 싶은 것 같이 느껴졌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니 기도 안찼다. 이제 갓 신입생이 “이봐 선배 양반, 내가 좀 아는데 당신 취업 준비는 틀려먹었어. 좀 더 청년답고 이상적인 취업 준비를 해야지~ 대기업 지원에 눈에 멀어 스펙만 생각해선 안된다~”하면 설득은 커녕 죽빵 한대 갈기고 싶을 텐데. 그냥 무시해버리거나.


두가지를 깨달았다.

첫째. 글쓴이의 권위라는 게 정말 중요하다. 

글쓴이는 자신이 이 사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으며, 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아이돌 성상품화에 대해 우리는 문화적 산업적 맥락에서 사실 아는 게 거의 없었고,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도 극히 협소했다. 반면 대학 구조조정에 대해서는 이해관계자인 만큼 꽤 많이 알았고 총장이나 학생처장을 찾아가는 등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꽤 많았다. 이 권위에 따라 같은 설득의 글도 결이 달라진다. 권위만으로 거의 다른 주장을 하는 글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둘째. 설득의 대상이 왜 나와 반대되는 생각을 가질 수 밖에 없었는지 헤아리는 과정을 글에 담아야 한다. 

혹 그 생각이 누가봐도 틀려보이더라도 마찬가지다. 이는 글쓴이가 다양한 시선으로 현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했다는 걸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반대 진영에서도 읽을 때 꽤 객관적인 글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그들에게 읽어줄 가치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감정적인 설득의 글은 읽히지도 않는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음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일단 그들이 읽어줘야 설득이든 도루묵이든 이따 내가 해먹을 보쌈이든 가능하다.


둘째 과정이 또 중요한 점은 이를 통해 상대방 입장을 어느정도 공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보다 반대 진영에 대한 지식이 빈곤하다. 글을 쓰며 상대를 헤아리는 과정은 상대방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고려를 통해 그 결정을 내렸는지를 심정적으로 이해할 힘을 준다. 그럼 감정적이었던 어조는 조심스러워질 수 밖에 없다. 이 조심스러움은 어쩌면 예의다. 설득은 대화지, 결투가 아니다. 헤아리지 않으면 대화는 불가능하다. 그래서인지 설득하는 글에서 생각을 고쳐먹을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글쓴이 자신이다. 물론 잘 쓴 설득의 글이 한정해서다.


두가지를 깨달은 뒤 우리의 토론과 글은 꽤 달라졌다(고 믿는다).



설득은 어렵다. 설득하는 글은 더 어렵다. 정말이지 설득이란 게 과연 인간 세상에서 가능한 일인지 회의도 든다. 그래서 설득은 전략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떤 권위를 갖고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나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왜 상대방은 저런 생각을 하는지 쉽게 결론짓는 일도 허다하다. 그렇게 허술하게 쓰여진 설득하는 글은 도저히 읽어주기 힘들다. 그런 글에 눌린 좋아요는 원래 내편이었던 사람의 것이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누군지 아는 것은 매우 가치 있고 또 흥미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충분히 설득하지 못한 글이다. 목적을 잃은 글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읽기 힘든 글은 ‘말하는 이유는 말하고 싶기 때문인 글’이다. 이런 글은 설득의 문체로 쓰였지만 그것보다도 글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인 것처럼 보인다. 무엇이 틀렸다고 말함으로 자신만큼은 맞는 존재라는 걸 알리고 싶은 것 같다. 모든 글은 틀림과 맞음의 벽쌓기고 결국 그 안에 자신이 갇히고 만다. 어쩌면 지금 내 글도 그렇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엇이 좋은 업무 커뮤니케이션인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