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를 말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과 다름 없다
커뮤니케이션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으로 나뉜다. 사적 커뮤니케이션은 매력적이고 예술적이고 긍정적이고 활기차고 다정하고 그러면 되는 것 같(은데 난 아무것도 해당하지 않는)다. '공적'인 업무 커뮤니케이션은 좀 다르다. '생산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공적인 소통에서 생산적이지 못하다면 긍정적이고 다정하고 요딴 것들 하나도 쓸모 없다. 보고 체계가 확실한, '보고' 그 자체가 업무 중 하나인 한국의 기업 문화에서 커뮤니케이션은 중요한 '일'이다.
난 군대에서 이를 알았는데, 군에서의 명령하달 체계는 추상적인데다가 단순하다. 추상적이면서 단순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 사람들의 사고 방식 자체가 이렇다. GOP 상황병 때 간부에게 새벽부터 눈이 조금씩 내린다고 보고하면 "이따 막사 주변 제설해라"는 피드백만 돌아올 뿐이다. 이때 상황병은 바빠 죽겠는데 나보고 제설까지 하라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고, '1) 적설량 및 추이 예상, 2) 시간대 별 가용 인원 체크' 등을 함께 재보고 한다. 그럼 간부는 '1) 언제 2) 누구와 3) 어떻게' 등 구체적인 지시를 내린다.
그나마 군대가 편한 것은 밑에서 상황 분석 및 추이를 예상해 브리핑하면 최종 지시는 간부가 똑 떨어지게 해준단 것이다. 속전속결이 중요한 이 집단에서는 '언제'가 참 중요하다. 개똥 같은 이 동네가 그나마 꾸역꾸역 굴러가는 이유는 지시사항에 '언제'가 꼭 포함됐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사회에서의 업무 커뮤니케이션은 좀 달랐다. 지시에 '언제'가 없는 경우가 많다. 피드백에도 '언제'가 없다. 처리를 하긴 할 건데 '언제' 할 지는 말하는 본인도 모른다. 그게 가장 큰 문제다. 예를 들어, 상사가 "우리가 앞으로 A란 목표를 위해 B란 프로세스를 도입할 것이니 모두 잘 따라주시오"라고 말한다. '목표'와 '행동'을 분명하게 드러냈지만 저 말은 후임들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질 못한다. '언제'가 없기 때문이다. '언제'를 말하지 않는 업무 커뮤니케이션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과 다름 없다. 실행에 옮길 수 없는 행동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언제'를 듣지 못한 후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는 '후임 -> 상사'란 보고 프로세스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후임은 "지시한 C란 업무는 현재 1까지 진행했으며, 완료는 '언제'까지 하겠다"고 말하는 게 맞다. 거기서 상사는 후임에게 신뢰가 쌓일 것이다. 이 녀석의 업무 진행 및 예상 완료 시기를 알고 있으니 내일과 모레와 1년 후의 업무를 미리 계획할 수 있으니까.
그럼 후임이 상사에게 피드백을 받아야 할 땐 어떨까? 마찬가지다. "D란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E가 필요하다"고 말할 때, 상사는 "E 없이 해라" 혹은 "E를 '언제'까지 주겠다"는 말을 해줘야 한다. E를 요구하는 것이 납득할 수 없다면 전자를, 납득 가능하다면 후자를 말해주면 될 것이다. 그래야 후임이 '다시' 일에 돌입할 수 있다. 피드백이란 그런 것이다. 후임은 업무 진행 중간에 막혔을 때 피드백을 요구한다. 이때 전자로도 후자로도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하는 상사가 있다면 그 조직은 망한다. 아무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제'는 구체적일수록 좋다. "F 프로젝트에 G가 부족하니 더 달라"는 동료의 요청에는 "G, 혹은 G'를 '언제'까지 주겠다"는 대답을 해줘야 한다. 그냥 "네" 혹은 "알겠습니다"란 대답은 명료하지만 부족하다. 업무에서 모자름은 틀린 것이다. 그러니까, 틀린 커뮤니케이션이다.
종종 '최대한 빨리', '조만간', '긍정적으로', '신속하게' 등 애매한 긍정의 표현으로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 경우가 있는데, 이 역시 '언제'를 말해주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틀린 것이다. 그 최대한 빨리, 조만간, 신속하게란 말은 두 사람이 함께 공유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대답은 지금 당장은 알아보지 않겠다는 대답과 같다. 긍정의 표현이지만 실은 '난 지금 그걸 신경쓸 수 없어'란 것과 똑같다. 그럼 후임은 "그래? 그렇다면 나도 일을 하지 않겟서"라고 속으로만 말하며 부들부들 하겠지.
한국의 기업 문화의 단점으로 '지나치게 많은 보고 체계'를 들곤 하는데, 규모가 작은 곳은 그런 관습은 많이 줄지 않았나란 생각이다(물론 작은 회사에서 '보고'가 업무 시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곳도 봤다). 요즘 내가 사회 초년생 친구들과 대화하며 느끼는 진짜 한국 기업 문화의 단점은 '언제'의 부재다. '언제'가 명확하지 않은 업무는 아이디어가 좋고 대박칠 것 같아도 계획적일 수 없고, 체계적일 수 없고, 순차적일 수 없다. 디테일이 없는 것이다. 그럼 잘 될 수가 없다. 그런 환경에서 일하는 건 다시 군대로 돌아가는 게 더 낫.. 긴 개뿔. 하늘님, 다시 군대 가는 꿈도 잘 안꾸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