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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nergist Dec 02. 2018

여유를 갖자

일주일 간의 오클랜드 이야기

도착했을 땐 아, 흐리네 했는데 지금 보니 저 정도면 날씨 되게 좋은 거였다.


떠나는 날까지도 나는 무덤덤했다. 1년 동안 누구 하나 기댈 곳 없는 뉴질랜드에서 혼자 살아야 하지만, 앞을 모르는 막막함이나 그 흔한 두근거림조차도 별로 없었다. 워낙 감정을 느끼거나 표현하는 데 인색하기도 하고, 평소에는 바닥을 기다가 한 번씩 피크를 치는 높은 자존감이 나는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줬기 때문이다. 평생 거기서 사는 것도 아니고 고작 1년인 걸.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공항까지 나를 데려다주겠다는 사람들을 말려야만 했다. 작은 것이라도 받고 나면 언젠가는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나는 사근사근 챙기는 스타일이 아니라, 혹시라도 도움받은 것을 잊어버린다면 그 사람이 실망하게 될 거라는 괜한 걱정을 먼저 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엄마도 지방에서 올라와 나를 차로 인천까지 데려다주고 싶어 했고, 남자 친구를 비롯한 친구들도 공항까지 같이 가 주길 원했다. 야, 덕분에 공항에서 여행 가는 기분이나 내보자 라며 웃는 소리들을 했다. 하지만 내가 출국장 안으로 돌아가고 나서 그들이 쓸쓸하게 돌아가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혹여라도 공항에서 괜히 기분이 센치해져서 눈물이라도 나면 어쩌나 싶기도 했고. (5년 전 엄마를 생각해 보면 또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오클랜드 페리 터미널 근처.


긴 비행을 마치고 도착한 오클랜드 공항. 16시간 전까지만 해도 롱 패딩을 입어야만 버틸 수 있는 도시에 있다가, 갑자기 28도의 여름 햇빛을 받으니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라는 것처럼 몸에서 땀이 흘렀다. 후다닥 캐리어를 열어 반팔 반바지로 갈아입고 숙소를 찾아갔다. 지난번 영국 갔을 때도 느꼈지만, 오랜 비행 후에 지친 몸으로 짐 한 보따리 끌고 대중교통 이용하는 게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이번에는 캐리어 20kg 하나에 메신저백 하나로 줄였지만, 런던에서 노트북 가방 메고 캐리어 두 개 끌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튜브를 탔었지. 그때 영국 신사분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아직도 눈앞이 캄캄하다. 불행 중 다행은, 지하철이 없는 오클랜드에서는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낑낑거리긴 했지만 나 스스로 버스에 짐을 실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하지만 여기서 안심하긴 이르다. 버스는 내부에 지도도 없고 안내방송도 없어서 초행길 여행자는 하염없이 구글맵 GPS만 쳐다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에 충격.


묵었던 airbnb가 있는 버킨헤드.


그렇게 정류장을 한번 지나치고.. 우여곡절 끝에 숙소에 무사히 도착은 했다. 초기 일주일 숙소는 에어비앤비로 선택했는데, 참 잘한 일이었다. 더 비싼 가격에 호스텔 도미토리 묵었으면 피곤한 몸과 더불어 진짜 짜증이 났을 게 뻔하다. 가격도 합리적이고 위치도 괜찮은 숙소를 찾아서 아늑한 싱글룸에 묵었다. 특히 동네가 너무 예뻐서 10-15분 거리 쇼핑몰까지는 걸어 다녀도 좋다. 워낙 자연친화적인 나라이다 보니 방에서 벌레도 가끔 나오고, 저렴한 숙소인 만큼 공용공간이 깨끗이 청소된 편도 아니지만 나는 크게 까탈 부리는 성격은 아니라서 그럭저럭 괜찮다. 하지만 그냥 이 한 몸 조용하게 쉴 수 있다는 게 좋다. 밤에 방 불을 끄면 거리에 가로등 불빛도 없어서 칠흑같이 어둡다. 바람이 워낙 많이 불어서 가만히 누워 듣고 있자면 바람소리가 꼭 파도소리 같다. 잘 안 알려져서 그렇지, 하루에 사계절이 다 있는 곳은 바로 여기다. 영국 런던은 명함도 못 내민다. 혹시나 해서 날씨 앱을 켜 봤는데 영국이 바람 시속 25km, 여기는 47km란다. 해가 있는 상태로 비도 오고, 스콜성으로 비가 훑고 가기도 한다. 여기는 바람의 나라다. 
 

데본포트. 흐려서 아쉬웠다.


오클랜드에서 일주일 있는 동안 초기 정착준비를 마치는 게 목표였다. 예약 없이 신분증만 들고 가면 계좌를 열 수 있는 우리나라와 달리(요즘에는 대포통장 때문에 절차가 까다로워지긴 했으나) 여기서는 은행 계좌를 열려면 예약도 잡아야 하고, 거주지 증명도 해야 한다. 사람이 많은 시기라서 일주일 안에 다 끝낼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굳이 한국인 직원만을 고집하는 게 아니라면 그렇게 예약이 미뤄지지는 않는다. 나는 운 좋게도 문의한 다음날 뉴마켓 지점에서 예약을 잡을 수 있었고, 에어비앤비 영수증으로 거주 증명을 해서 순조롭게 계좌를 열었다. 온라인으로 IRD 넘버 신청도 끝냈고. 일주일이나 잡은 게 허무할 정도로 하루 이틀 만에 일을 할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끝나버려서, 나머지 시간 동안은 천천히 오클랜드를 둘러보면서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가는 곳마다 이국적인 풍경에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구경을 한다. 나는 걷는 것도 워낙 좋아해서, 시티 쪽에서는 계속 골목골목 돌아다니면서 길을 익혔다. 여행자 기분이나 좀 내 보자 하고 스카이타워에도 올라갔었고, 아기자기한 마을인 타카푸나-데본포트 쪽에서도 사진을 많이 남겼다. 제일 좋은 건 노스쇼어에서 시티센터로 가기 위해 하버브릿지를 건널 때인데, 옆에 탁 트인 바다가 버스 창문으로 보일 때면 이게 버스에서 볼 수 있는 뷰인가 싶다. 사람들도 핸드폰에 코를 처박고 있다가 하버브릿지를 건널 때가 되면 밖을 쳐다보는데, 당산에서 합정 넘어오는 2호선을 탈 때가 생각났다. 매일 보는 한강이라도 왠지 2호선 열차 안에서 보면 마음이 간질간질한데, 여기 사람들도 하버브릿지를 건널 때 그런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인종과 국적을 넘어 사람 사는 게 왠지 다 비슷한 것 같다.


와이헤케 아일랜드. 물빛이 너무 아름답다.


근교에 아주 아름다운 와이헤케라는 섬이 있다길래, 하루 종일 그 섬에 가 있던 적도 있었다. 시티센터를 제외하면 모든 곳들이 정말 시골 같고 조용하다. 나처럼 돌아다니는 관광객들도 많은 편이 아닌데, 알고 보니 와이헤케섬은 빈야드가 유명해서 다들 와인투어를 한다고. 나는 와알못이니 패스. 


제일 번화한 도시에서 40분만 배를 타면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니.


날씨가 다 했다. 저 청명한 하늘색, 바다색, 아직도 눈에 아른아른하다. 태평양의 이 아름다움을 나만 몰랐던 것 같다. 가만히 앉아 점심으로 산 파니니를 먹고 있는데, 노부부가 와서 내 앞 벤치에 슬쩍 앉았다.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분들은 대화하기가 쉽다. 캐나다에서 놀러 왔다며, 이런저런 이야기 하는 끝에 캐나다도 워홀 있으니까 한번 도전해보라고 하신다. 대신 -20도를 견뎌야 한다며, 핸드폰에 든 캐나다 겨울 사진 전부를 보여주고 싶어 하시던 (팔에 CANADA 레터링 문신을 한)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엉덩이를 일으키셨다.



그들이 떠나고, 바다를 바라보며 메모장을 꺼내 이런저런 생각 정리를 하려는데 어떤 아저씨가 개를 산책시키면서 나에게 일본인이냐고 물었다. 아뇨 코리안인데요. 그러자 또 이런저런 이야기 대잔치가 시작됐다. 피터라는 이름의 키위였는데, ESOL(이민자들을 위한 랭귀지코스) 선생님으로 있는 동안 작년에 아시안만 25명 넘게 가르쳤다고 했다. 그러면서 왜 아시안들은 이 멋진 퍼시픽까지 와서 수영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있냐고 너도 수영할 줄 모르냐며 뜻밖의 혼쭐.. 거의 한 시간은 신나게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러덜리스 주인공처럼 요트에서 산다고 했다! 나중에 자기 요트에서 같이 음식도 해 먹고, 카약도 타고, 스노클링도 가르쳐주고 하는 B&B 호스트가 될 거라고 했다. 나도 그런 방랑 생활을 하고 싶어서 캠퍼밴을 직접 만들 거라고 하니까 중고차 페어도 추천해주고, 이런저런 정보들도 많이 알려줬다. 지금 영어는 잘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집을 떠나 이 먼 곳까지 혼자 여행 온 것 자체로도 충분히 용기 있는 일이니 여기서는 물론이고 돌아가서도 충분히 좋은 일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네 남자 친구는 너 같은 사람을 만나서 참 행운이라고 자신감을 북돋아줬다.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 번호까지 알려줬다. 즐거웠던 Mr. Have a Chat! (학교에서 아이들이 그렇게 불렀다고..) 과의 대화.


길바닥에 사람이 없다. 차만 있음.


다른 해변으로 넘어가려 버스기사님한테 길을 물었는데, 이 버스는 안 가지만 마침 다음 정류장에 서 있는 다른 버스를 잡아주겠다며 휘리릭 데려다줬다. 수영은 못 하지만 바다에 발 담그고 신나게 놀다가 해변가에서 쉬며 사진 찍고 카메라 필름을 가는데 지나가던 아저씨가 카메라에 모래 안 닿게 조심하라며 코를 찡긋 하고 간다. 여기 사람들의 이런 친절과 여유로움은 어디서 나오는가 궁금해진다. 뉴질랜드에 도착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지만, 한국과 너무나 다른 차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땅 자체가 넓고 인구수는 적은 곳이라, 집들이 꽤나 크고 각각 앞뒤로 마당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옆집과 적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단독주택이라 층간소음도 없고, 그래서 다들 조용하게 살게 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음악 빵빵하게 틀고 떠든다 해도 엄청나게 시끄러운 소음이 전달될 거리도 아니다. 전체 인구의 37%가 살고 있다는 오클랜드인데도 불구하고, 전체 인구 자체가 부산시민의 수와 비슷해서 1인 1차를 가지고 다녀도 교통체증이 없다. 만원 버스는 출, 퇴근시간과 관광객들이 이용하는 노선버스 말고는 본 적이 없고, 신호에 걸린 대기차량이 줄지어 서있는 걸 못 봤다. 주말에나 차들이 많이 왔다 갔다 하지만 평일 낮에도 막히는 강변북로에 비하면 이건 귀여운 편이다. 


여기서는 사람들과 인상 쓸 일이 전혀 없었다. 키위들은 과하게 친절했으면 했지, 이방인인 나에게 한 명도 못되게 군 사람이 없다. 오히려 “키위들은 너를 알고 싶어 해! 맘껏 말 걸어!”라는 피터 아저씨의 말이 머리를 스친다. 무표정한 사람들과, 화가 난 것 같은 사람들로 꽉 찬 서울을 다시 한번 떠올려본다. 이렇게 마음의 여유가 있다 보니, 모두가 서로를 먼저 생각하고 배려한다. 버스기사 아저씨는 킥보드를 들고 타는 아이들을 위해 직접 운전석에서 나와 뒷좌석에 여유가 있나 봐 주고, 길거리에서는 스치기도 전에 서로에게 I’m sorry를 내뱉는다. 버스에서 노약자와 장애인 혹은 조금이라도 몸이 불편하거나 무거운 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대하는 것만 봐도 다르다. 시민의식이란 게 이런 것일까. 이건 물질적인 풍요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이 풍요로워야 그 마음 사이에 남들도 생각해 줄 수 있는 틈이 생기는 것이다. 


오클랜드 중심 아오테아광장.


반대로, 서울에서 내가 답답함을 느꼈던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창문을 열어도 어디 하나 탁 트인 곳이 없고, 방범창이 있어야 해서 꼭 감옥 같은 느낌을 줬던 게 큰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숨이 탁탁 막힌다. 층층으로 높이 쌓아 올린 아파트가 대부분의 주거공간이고, 집 사이의 거리도 짧아서 소음에 많이 노출된다. 아주 편하게 있어야 할 내 공간에서 원치 않는 소음을 계속 듣는다는 건 굉장한 스트레스다. 좁은 땅에 많은 사람들이 사니까 당연한 이치지만,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공간이 그렇게 넓지 않다 보니 내 자유에 대한 침해가 잦다. 대학교에 다닐 때 원룸텔에 산 적이 있었다. 말이 좋아 원룸텔이지, 방 한 칸에 창문과 화장실이 딸린 조금 부유한 형태의 고시원이다. 판자로 가벽을 대다 보니 옆방 소음이 그대로 넘어오기 때문에, 한동안 나는 내가 일어나지 않아도 될 시간에 울리는 옆방 사람의 모닝콜 노래를 끔찍하게 싫어한 적도 있다. 학생인 내가 보증금 없이 살기에 그보다 더 적합한 공간이 없다는 게 슬프다. 나 자신도 서울 출신이지만, 서울 사람들은 여유가 없어 보인다. 적어도 친해지기 전까지는. 그런 면 때문에 서울깍쟁이라는 말이 생긴 게 아닐까? 내 마음에도 여유가 없는데, 내 코가 석잔데 누굴 도와?라는 마음인가. 사실 여기로 오기 전까지 나의 마음이 딱 이것과 같았다. 


서울 중심으로 돌아가는 건 분명한 문제다. 세종으로 대부분의 공공기관을 옮긴다 한들,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옛말이 없어질까. 동시에 나부터도 서울의 편리함을 잃기 힘들 것 같다. 나는 가끔 엄마가 노후를 보내기 위해 내려간 홍성으로 하루 이틀만 잠시 놀러 가도 원시생활로 돌아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서울에서 평생을 살았기에 더욱 그런 것에 익숙지 않기 때문일 테다. 평생 거기서 살라고 하면, 과연 내가 버틸 수 있을까? 이러나저러나 나는 답답한 도시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트위터에서 서울의 가난이라는 단어를 보았다. 이렇게 양립하는 단어의 조합이 있을까. 서울은 한국의 수도이면서 동시에 부의 상징들이 모여있는 곳이 아닌가. 게다가 물가는 전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높다. 그 트윗 이용자는 개인 작업실을 찾는데 빼곡히 들어선 작은 공간들이 너무 답답했다고 했다. 비싼 도시에서의 가난이란 뭐고, 또 부란 뭘까 궁금해진다. 나는 서울에서 가난하지 않을 수 있을까, 혹은 서울에서 가난해도 괜찮을까? 서울에서 뉴질랜드의 여유를 느낄 수는 없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친절을 베푼 버스 기사님 덕분에 팜 비치로 넘어와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한참 앉아있었다. 해변에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눕거나 엎드려서 선탠 하며 책을 읽고, 강아지와 공 던지기 놀이를 하고, 어린아이의 그네를 밀어주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성공적인 워홀 생활의 목표인 몸과 마음의 독소를 빼는 것,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터 아저씨와의 대화처럼 용기만 있다면. 가까운 미래에 수영복을 사는 나를 떠올려본다. 


* 2018년 1월 블로그에 먼저 작성된 글들을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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